경비가 삼엄한 적 군사기지. 군사 차량의 바닥에 매달려 출입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높은 철망은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절단기로 끊고 안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 간다. CCTV가 있지만, 전원만 차단하면 무용지물이다. 아무리 견고한 보안 장비라고 해도 반드시 뚫고 지나간다.
매년 한두 편 이상은 반드시 제작되는 첩보영화에는 이와 비슷한 장면이 항상 나온다. 스파이들은 항상 적의 빈틈을 노려 건물에 침입하고, 원하는 정보나 물건을 훔쳐 유유히 빠져나온다. 영화가 워낙 현실감 있게 그려지다 보니 실제 보안 시설에도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지만 우리의 주요 시설들은 제대로 된 대비가 되어 있는 걸까?
대전 유성구에는 원자력 관련 시설의 물리적 방호 시스템을 시험하고 관계자들에게 교육하는 시설이 있다. 바로 원자력안전위원회(NSSC) 산하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KINAC)에서 운영하는 핵안보 교육·시험시설(SETT, Nuclear Security Training Research and Test facility)이 바로 그것이다. SETT는 체험형 교육을 위한 훈련시설과 첨단 시험장비를 갖춘 약 23,000㎡ 규모의 대형 시험·연구시설이다.
▲ 공항만 방사선 검색 및 출입통제 시스템
물리적 방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핵비확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원자력을 사용하는 국가는 이를 평화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의무를 동시에 가지게 된다. 이를 핵비확산이라고 하는데 이를 위한 대표적인 수단 중 하나가 원자력시설을 내·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물리적방호이다. 그리고 이와 관계되는 대표적 국제기관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있으며 국내에는 앞서 말한 NSSC와 KINAC이 이를 책임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물리적 방호라고 하면 탐지, 지연, 대응의 세 가지를 수행해야 한다. 즉, 적의 침투를 미리 알아내고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시설까지 오는 시간을 지연시키고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SETT에서는 이 3가지 모두를 미리 수행해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에 필요한 장비에 대해 교육도 받을 수 있다.
원자력 시설 출입통제 시스템을 현장 그대로 구현
SETT 외부에는 총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 ‘물리적방호 외부교육·시험시설’이 있다. 이곳에서는 물리적 방호에 필요한 다양한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다. 시설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1구역은 ‘공항만 방사선 검색 및 출입통제 시스템’이다. 이 섹터는 원자력 시설 출입을 위해 거쳐야 하는 절차를 그대로 구현한다. 일단 출입자는 차량 출입통제 시스템에서 신분을 확인한 후 통과해야 한다. 출입통제 시스템을 지나면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차량 하부 검색기를 지나야 한다. 바닥에 있는 카메라가 차량 하부의 이상 여부를 점검한다. 차종별 하부 구조 이미지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있어 조금이라도 이상이 발견됐을 시 조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바닥에 매달려 출입구를 통과하려는 적이나 폭발물 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강제로 검색 시스템을 통과해 안으로 침입하려는 적은 다양한 차단물을 이용해서 막을 수 있다. SETT에서는 실제 차량을 이용한 시험을 통해 시멘트로 제작된 차단물이 다른 차단물에 비해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장비와 구조물을 시험하여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도 이곳의 임무다.
원자력 관련 시설에서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는 방사성 물질의 유출이다. 방사능 포탈 검색 시스템이 몰래 빠져나가는 방사성 물질을 감지한다. 그 외에도 화물 검색 시스템, 레이저 스캔 탐지기 등이 설치되어 관련 내용을 교육·훈련할 수 있다. 이러한 장비들은 실제 시설에서 운영하는 방식과 똑같이 구성되어 가상으로 출입통제를 시험해 볼 수 있다.
2구역은 ‘상용 물리적 방호 설비 시스템’으로 원자력 시설에 현재 사용되고 있는 물리적 방호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 적이 시설에 침투하기 위해 철조망을 훼손 하거나 시설까지 이동하는 행동을 감지할 수 있는 장비들이 다수 갖춰져 있다. 대표적으로 철조망에 설치하는 감지기를 들 수 있다. 적이 철조망을 넘기 위해 흔들거나 도구를 이용해 자를 때 생기는 진동을 감지하는 장비로 자력, 광섬유, 페리덕트 방식의 센서가 있다. 적의 이동을 감지하기 위한 적외선 감지기와 적외선과 마이크로웨이브가 조합된 ‘듀얼텍 센서’도 시험해 볼 수 있다. 태양광이나 월광의 빛 반사에 가장 적합한 바닥재를 확인하기 위해 바닥은 콘크리트, 자갈, 시멘트 등 다양한 재질로 깔렸다. 다양한 CCTV가 설치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 상용 물리적방호 설비 시스템
미래 기술과 현장 대응 방법 시험·교육
아직 사용되지 않고 있는 첨단 방호 설비를 설치하고 시험·연구할 수 있는 곳은 3구역이다. 빛이 없는 곳에서 최대 1.2Km를 탐지할 수 있는 고성능 열화상 카메라나 지형과 현장에 딱 맞게 설계 제작할 수 있고 잘못된 경보를 내보내는 경우가 적은 ‘레이져 광망 센서’ 등이 설치되어 시험 중이다. 아직은 실제로 사용되지 않는 장비들이지만 이곳에서 성능 실험에 통과한다면 언제든지 실제 현장에 설치될 수 있는 장비들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지연 시설을 통과한 적이라면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 이 적정한 대응을 위한 시험시설이 바로 4구역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원자력 발전소의 축소모델을 구축해서 가상 침입 시뮬레이션을 통해 최종 시설까지 침입완료시간, 침입경로, 침입방법 등에 대한 실제 시험을 할 수 있다. 철조망 절단 등 다양한 침입 방법을 실제처럼 수행해 볼 수 있다. 특히 실제 마일즈(MILES: 다중통합 레이저 교전체계) 장비를 이용해 적들과 대응하는 훈련도 진행한다.
SETT는 실외 교육 시설 외에 실내에도 다양한 교육 시설을 갖춰두고 있다. 실내용 탐지 장비를 갖춰 놓은 ‘탐지장비실’에서는 외부 시설과 같은 종류의 탐지기와 감지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환경에 따라 센서가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는지 그 영향은 어떠한지를 파악할 수 있다. 출입통제 및 지연설비가 있는 ‘출입통제장비실’에는 물리적 방호의 지연에 해당하는 구역이다.
효과적인 지연물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또 실제 사용하고 있는 잠금 장치나 도어의 종류를 교육생들이 알기 쉽도록 구성해놓았다. ‘도상훈련실’에는 원자력시설 모형 및 설계도면을 기반으로 도상훈련이 가능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모형을 이용하면 좀 더 실제와 비슷한 계획을 모사할 수 있다.
중앙통제실 CAS에서는 물리적방호 외부교육·시험시설을 실제와 똑같이 관제·관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외부 침입 탐지 센서의 신호와 외부 카메라의 영상이 전송되어 원전시설의 중앙통제실 기능을 똑같이 구현한다. 특히 3D 가상현실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비디오 관리 시스템과 침입 감지 시스템으로부터 받은 신호를 좀 더 정확하게 눈으로 볼 수 있다.
▲ SETT/CAS 중앙통제실
SETT를 모두 둘러보면 영화 속 침입자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영화주인공처럼 초능력자 수준의 침입자도 허구겠지만, 그렇게 쉽게 뚫리는 시설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다. 물론 적들은 계속 새로운 기술과 장비를 개발하여 침투를 노리겠지만, 우리도 SETT와 같은 시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거기에 대한 방어 태세를 계속 견고히 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KINAC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NSSC와 함께 SETT의 효과적인 운영을 위한 여러 방안을 적극 강구하고 있다. SETT가 우리나라 물리적 방호 강화를 위한 첨단 시험장으로 그 역할을 다 하는 한편 세계 수준의 교육·시험장으로 우뚝 서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