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가의 시선으로 본 화산섬 제주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은 화산섬 제주에 가보는 겁니다"
나는 과학 탐험이란 전문가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신념 아래 책에서만 보던 곳을 직접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서호주 사막, 몽골 동고비 사막, 알래스카 북극권 등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의 유산이 쌓인 곳을 답사하고 그곳에서 느낀 것을 일반인에게 소개했다.
그런 일을 하며 많은 외국 과학자를 만났는데, 그들은 한국에서 온 나에게 "제주도에 가봤냐"는 질문을 자주 했다. 나는 당시 제주의 지질학적 가치를 잘 몰라 경관이 아름다운 제주의 몇 곳을 소개했다. 소개에 덧붙여 관광명소와 유명 카페, 레스토랑 정보를 말하니 그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리고 되묻기를 "한국에도 제주도처럼 과학적인 가치가 큰 섬이 있는데 왜 해외를 탐험하느냐"고 물었다. 처음엔 한국에서 온 내게 인사치레로 하는 얘긴 줄 알았다. 하지만 그 후로 어느 지역을 탐험하든 비슷한 질문을 꼭 받았다. "제주도에 가봤냐고"
매번 제주도는 아름다운 섬이라는 피상적인 답변만 하니 제주도에 대한 알 수 없는 부채감이 들었다. 이를 계기로 기회가 되면 제주도를 제대로 탐험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다 2009년 제주도와 형성과정이 비슷한 하와이 빅아일랜드섬으로 탐험을 갔다. 두 눈으로 액체상태의 용암을 보고 싶었다.
지난 5월 다시 분출한 빅아일랜드섬의 킬라우에아 화산은 여전히 붉은 용암이 바닷물로 유입되는 장엄한 광경을 연출했다. 화산국립공원 내에 있는 재거박물관에 방문했다가 은퇴한 화산학자를 만났다.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이 제주도에 가보는 거라며 나를 반겼다.
도대체 팔순이 넘은 학자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그는 세 가지를 얘기했다.

▲ 남방한계식물과 북방한계식물이 공존하는 독특한 숲 생태계 곶자왈의 모습.
첫째, "제주도는 하와이와 형제섬"이라는 표현을 썼다. 두 섬 중앙에 있는 화산을 측면에서 보면 경사가 완만해 마치 방패를 뒤집어 놓은 모양을 닮았다.
남방한계식물과 북방한계식물이 공존하는 독특한 숲 생태계 곶자왈의 모습.
그래서 방패화산 또는 순상화산이라고 부른다. 이는 끈적거리지 않는 현무암질 용암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순상화산은 마그마의 점성이 약해 용암이 바로 흘러버리기 때문에 완만한 형태를 만든다.
둘째로 곶자왈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제주도 같은 화산섬은 내륙의 토양과 성분이 달라 작물 경작에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 어려움 덕분에 화산섬에서만 자생할 수 있는 곶자왈 같은 독특한 생태 환경을 만들었다.
제주 곶자왈은 지구상에서 남방한계식물과 북방한계식물이 공존하는 유일한 숲 생태계이다.
마지막으로 곶자왈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제주사람들의 삶을 엿보고 싶다고 했다. 제주도를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만 생각했던 나에게 그의 대답은 충격이었다. 그가 보고 싶은 제주는
아름다운 경관 너머에 있는 지질학, 생태학, 인류학적 다양성의 보고로서의 모습이었다.
수성화산의 성지 성산일출봉, 그곳에 가고 싶다
제주도 하면 떠오르는 장소는 대개 성산일출봉이다. 2007년 제주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제주를 찾는 외국 여행자에게도 성산일출봉은 특별한 장소가 됐다. 매표소 앞에서 올려다본 웅장한 분화구는
누가 보더라도 저절로 경건함을 준다. 성산일출봉은 약 5천 년 전, 현재와 비슷한 환경에서 얕은 수심의 해저 화산이 분출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뜨거운 마그마가 분출하다가 지하수나 바닷물을 만나 물이 끓으며
강한 폭발을 일으켜 터져 나온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수성화산이다.

▲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돋이 명소로 꼽히기도 하는 성산일출봉은 지질학적 가치가 높은 화산체이다.
1963년 아이슬란드 남쪽 바다에서 대규모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쉬르트세이섬을 통해 제주도 주요 화산체의 형성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바닷속에서 용암이 분출해 섬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물을 머금은 화산재와 수증기가 거대한 분수같이 솟구치며 몇 달간 격렬한 분출이 계속됐다.
화산학자들은 쉬르트세이 섬의 분출 과정을 지켜보며 수성화산활동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됐다. 쉬르트세이 섬이 만들어진 시간을 감안하면 성산일출봉이나 수월봉 같은 수성화산체가 만들어진 시간과 과정을 가늠할 수 있다.
지구상에 유사한 형태의 수성화산이 많지만 성산일출봉의 지질학적 가치는 가히 세계적이다.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수성화산은 한 차례의 분출로 생기는데 성산일출봉은 세 번의 분출로 생겼다. 성산일출봉 동쪽에 있는 작은 바위섬인 새끼청산 부근을 중심으로 1차 화산이 분출돼 하부를 만들고, 서쪽에서 분출한 화산으로 중간부가 생겼다. 마지막으로 3차 분출에 의해 현재 왕관모양을 하고 있는 정상부가 생겼다. 그 뒤 수 천 년 간 성산일출봉은 매서운 제주바다의 파도, 바람의 영향으로 화산재 층이 깎여 나가 분화구의 내부구조와 침식에 의한 퇴적과정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화산학자들에 따르면 성산일출봉처럼 수성화산체의 내부 구조를 볼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하와이 오하우섬에 있는 다이아몬드헤드화산은 규모면에서 성산일출봉을 압도하지만 파도에 의한 침식작용이 덜해 화산체 내부 구조를 자세히 볼 수 없다. 해외에서 만난 화산학자들이 왜 그토록 제주를 오고 싶어 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제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귀한 섬이다"

▲ 용암이 급격하게 식어 형성된 주상절리도 제주도의 지질학적 가치를 드높이는 유산이다.
제주에서 20년 가까이 사진기자로 활동한 제주민예총 강정효 이사장의 저서 <한라산 이야기>에 따르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는 "새가 날다가 아름다운 곳을 찾았을 때 매일 오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제주를 찾는다"는
문장으로 제주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처럼 국경과 이념을 떠나 제주자연이 발산하는 아름다움과 가치는 다르지 않다.
이쯤에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제주도는 왜 국내보다 해외에서 그 가치를 더 알아주는 걸까.
우리는 왜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제주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걸까. 탐험가의 시선으로 생각해 보면, 제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 서울면적의 세 배에 달한다. 서울 사람 중에도 남산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태반이다. 자주 갈 수 없는 곳이니 해안도로 주변에 있는 관광지만 들리기에도 시간이 부족했을 거라고 명분을 찾아본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제주를 바라보면 되느냐고 누군가 물어볼 것이다. 과학자나 탐험가처럼 제주를 연구하고 탐험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저 제주의 과학자와 탐험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들의 목소리를 내 가족에게, 친구에게 전달하는 작은 행동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작은 행동이 모인다면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섬 제주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인이 제주의 가치를 알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제주의 자연은 모진 풍화와 난개발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자연유산이다. 제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귀한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