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문학에 나타난 핵전쟁과 세계의 종말

종말과 파국에 대한 두려움은 늘 인류 역사와 함께 해왔지만 20세기 이전까지 그 대상은 자연재해였다. 지진이나 화산, 해일, 전염병, 그리고 소행성 충돌 같은 천문학적 재난까지. 그러나 20세기 들어 과학기술 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인간 스스로가 초래하는 악몽의 시나리오들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핵전쟁이나 환경오염 등이 대표적이고, 심지어 인공지능도 새로운 위협의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공포는 역시 핵전쟁으로 인한 묵시록적 전망이다. 냉전 시대가 지나갔음에도 핵 재난에 대한 두려움이 끈질기게 남아 있는 이유는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에서 보듯이 일단 발생하면 그 여파가 너무나 길고 깊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핵 공포

▲ 우리나라 최초의 재앙 이후 소설이 실린 자유문학의 표지. <재앙부조>는 열강들의 무기 경쟁과 전쟁 위협에 둘러싸인,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한다. c. 열화당.
1960년에 문학잡지 <<자유문학>>에서 공모한 제1회 신인상에서 소설부문에 당선된 작품은 김윤주의 <재앙부조>였다.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한국현대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재앙 이후 소설'로 남아 있다. 핵전쟁 이후 폐허가 된 서울에서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인간 군상이 등장하는 단편소설이다.
당시 이 작품이 나온 배경에는 여러 층위의 맥락이 엿보인다. 맨 아래에는 미국과 옛 소련이 대치하던 냉전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고, 그 위에 한국전쟁 이후 휴전 상태로 남은 남북한의 분단 상황이 중첩된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이 초래한 종말의 지옥도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우리나라는 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정부 차원에서 원자력에 대한 대국민 캠페인을 활발하게 시행했었다. 새로운 에너지원으로서 원자력의 가능성을 알리는 교재가 초ㆍ중ㆍ고등학교 교과서에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핵전쟁의 위협도 심각하게 보아서 국민 대피 요령을 알리기도 했고 잡지에는 서울에 핵폭탄이 떨어질 경우 피해가 어떨 것인지를 반경 몇 킬로미터마다 보여주는 그림이 실리기도 했다.
이렇듯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원자력에 대한 태도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원자력발전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사회적 시선에는 갈등 양상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쓸쓸한 종말의 나날

▲ 핵 전쟁 후 폐허가 된 세계를 그린 네블 슈트의<해변에서> 한국어 번역본. 네빌 슈트는 희망도 절망도 없는 종말 이후의 세계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c. 블루프린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핵전쟁 종말 문학'으로 네빌 슈트의<해변에서(On the Beach)>가 있다. 1957년에 처음 발표된 이 소설은 1959년에 그레고리 펙과 에바 가드너가 주연한 영화로 제작되어 유명해졌으며, 우리나라에도 <그날이 오면>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아직까지도 많은 중장년이 기억하는 작품이다.
전면적인 핵전쟁으로 세계가 멸망하고 호주만이 살아남지만, 그들도 지구를 점점 뒤덮는 방사능 낙진으로 인해 몇 달 뒤에는 종말을 고할 운명이다. 전쟁에서 요행히 살아남은 잠수함 한 척이 혹시 있을지도 모를 생존자를 찾아 죽음의 대륙이 된 미국까지 갔다가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귀환한다. 정부에서는 자살약을 나누어주기도 하지만 호주 국민들은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롭게 보내고자 한다.
핵전쟁에 의한 종말이 유난히 공포스런 이유는 오래도록 지속되는 방사능 피해 때문이다. 다른 종말 시나리오와는 달리 핵전쟁 이후 세계에 대한 전망이 유독 어둡고 암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연 재해의 경우 일단 위기가 지나가면 재건의 희망이 움트기 마련이지만, 핵으로 인한 재난은 돌연변이 인간이 탄생한다거나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금지된 구역들이 남는다거나 과학기술에 대한 반감으로 문명이 퇴보하는 등 디스토피아적 연쇄 반응이 이어지리라고 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폐허 속에서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다

▲ 소설과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모두 SF 역사의 불멸의 작품으로 남은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의 한국어 번역본. 이 소설은 핵전쟁으로 인한 종말 이후의 인간성에 대해 질문한다. c. 폴라북스
핵전쟁으로 몰락한 지구의 삶을 다룬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아무래도 SF계의 노벨상인 휴고상을 받았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된 상을 가진 작가,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이다. 이 작품은 리들리 스콧이 감독하고 해리슨 포드가 출연한 영화사에 길이 남은 걸작,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핵전쟁으로 대다수의 사람이 낙진과 방사능을 피해 다른 행성으로 이주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우주로 떠날 여건이 안 되는 사람들은 황폐화된 도시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동물은 방사능 오염으로 멸종돼 살아 있는 동물을 귀중하게 여기고 산 동물을 키우는 것이 일종의 특권이 된 세상이다.
주인공 릭 데커드는 이런 세상에서 화성을 탈출해 지구로 도망쳐온 인간형 로봇, 안드로이드를 잡아 돈을 받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이 작품은 기계 동물과 진짜 동물,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대비하며 무엇인 진짜 생명인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철학적 소설이다. 데커드는 진짜 동물을 사기 위해 안드로이드를 '퇴역'시키러 다니지만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명확히 구별해주는 차이가 정말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에 빠진다.
인간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안드로이드는 기계일 뿐일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는 인간도 안드로이드와 같지 않을까? 작품을 답을 내리지 않은 채 독자들에게 폐허 속에서 다시금 인간성이란 무엇인지 성찰하도록 요구한다.
종말 문학은 경고를 담은 시뮬레이션
SF문학에서 핵무기를 포함한 여러 재난과 종말 이후의 세계가 자주 나오는 이유는 단지 공상이 주는 자극 때문이 아니다. 그런 종말이 잘못된 선택으로 한 순간에 도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핵전쟁을 배경으로 한 종말 문학이 냉전 시기에 폭발적으로 창작되었던 것도 이런 사실을 방증한다.
이와 더불어 종말문학은 종말 이후의 세상에서 사람과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를 상상하고 예측함으로써 지금 현실에서 고치거나 대비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인간과 사회 집단이 어떤 약점을 갖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쉽게 퍼지는 유언비어, 생존을 위해 서로 대립하고 반목하는 집단, 취약한 안전기반시설 때문에 일어나는 죽음 같이 종말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갈등 요인은 종말 이후에 이런 요인이 더욱 크게 증폭될 수 있음을 알린다.
SF 작가들은 우리가 정말 종말로 갈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작가들은 오히려 그런 디스토피아가 결코 현실이 되지 않도록 반면교사적인 경고와 교훈을 담아 낸다. 세계의 종말은 언제까지나 허구의 시나리오로만 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