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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원자력 이야기

핵무기 개발 국제정세와 평화체제 구축




멸망의 수단을 얻은 인류

1945년 7월 16일 5시 29분 45초, 미국 뉴멕시코의 앨러모 고도 사막 한가운데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저녁으로 접어들었지만 아직 햇빛을 강하게 품은 하늘이 어두워 보일 정도로 엄청난 섬광과 함께 16km나 떨어진 관측장소에서도 열기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 강한 열이 방출됐다. 급격한 폭발로 인한 버섯구름은 대류권을 뚫고 12km 상공까지 뻗어올랐으며 폭심지를 중심으로 직경 340m에 이르는 구덩이 전체가 강한 열로 인해 모래가 녹아 생성된 유리로 뒤덮였다.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인 '트리니티'였다.

실험을 지켜본 이들은 저마다 입장에 따라 심경이 복잡했다. 군 관계자는 질기게 저항해 온 일본제국을 최소한의 희생으로 찍어누를 수 있는 무기를 손에 쥐어서 기뻐했고, 정부 관료들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투입된 막대한 예산이 대체 어디로 간 건지 국회에서 해명하느라 진땀 뺄 일이 없어져서 안도했으며, 과학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의 노력이 맺은 결실에 만족감을 느꼈다.

▲ 최초의 핵폭발 실험에 쓰인 '트리니티'의 모습. c. pinterest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플루토늄을 꽉꽉 쟁여넣은 이 쇳덩어리가 도시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을 어떤 꼴로 만들어놓을지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1945년 3월에 유례없는 대공습으로 도쿄를 황무지로 만들어놓은 바 있는 핵무기는 정치인과 군인들에게 많이 강력한 '폭탄'일 뿐이었다. 반면 과학자들은 폭탄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엄청난 무기가 위협용으로만 사용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에게 무척이나 경악스러웠다. 과학자들의 당혹감은 프로젝트를 이끈 오펜하이머가 힌두교의 경전을 인용해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는 말로 착잡함을 드러낸 데서 잘 드러난다. 프로젝트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아인슈타인은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버렸을 것이다"라며 후회하기도 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 중 상당수는 '우리가 대체 무엇을 만든 것인가?'라며 죄책감에 빠졌다.

피하고 싶은 미래

핵무기의 위력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관계자들이 애써 피하고 싶던 진실을 드러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핵무기는 폭격기 세 대와 단 한 발의 폭탄만으로 중간 규모의 도시를 지워버렸다. 이에 비해 도쿄를 초토화한 도쿄 대공습에는 수백 대의 폭격기가 동원됐다. 과거 어떤 무기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그리고 손쉽게 수만 단위의 인명을 앗아간 것이다. 이미 실전에서 사용된 이상, 핵무기가 대량으로 양산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축이었던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오펜하이머는 핵무기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c. wikipedia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과학기술은 국경을 넘어 확산되는 경향이 있어서 기밀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미 20세기 초반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지적 폭발'이 일어난 시기에 과학자들은 국적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서로 수천 km 떨어진 곳에 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비슷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익숙해 있었다. 자연히 특정 국가가 기술을 독점하는 상황은 오래 지속되기 어려웠다. 머잖아 소련도 미국처럼 핵무기 기술을 확보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보였고, 종국에는 주요국 모두 핵무기를 하나쯤 보유할 것이 자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대전과 같은 분쟁이 또 일어난다면 결과는 엄청난 규모의 파괴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들은 전쟁기간 동안 기술 발전이 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데서 원인을 찾았다. 기술을 정치적, 군사적 이해관계에 사용하다 보면 자연히 상대방에 우위를 점하고자 무기 기술을 독점하려 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모든 국가가 상대방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더 많이 보유하려 들어 전세계적인 군비 경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무기 관련 연구를 민간의 책임에 맡긴다면 상대방을 제압하는 데 필요한 무기보다는 서로 경제적 이익을 얻고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고자 협력연구에 더 중점이 놓일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과학자들은 국제주의적인 상호 협력이야말로 전세계를 무제한적인 군비 경쟁에서 구원하리라 생각했다. 그 변화의 적임자는 핵무기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국제적인 협력에 익숙한 과학자들 자신이었다.

과학자들은 곧 핵무기 기술을 독점하고 비밀에 부치려는 군의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들은 대부분이 낮은 지위에 있던 젊은 과학자들이었지만 곧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 1945년 10월 중순에는 오크리지연구소, 로스알라모스연구소, 시카고 대학의 과학자들이 개별적으로 만든 모임이 '맨해튼 프로젝트 과학자들의 모임(The Association of Manhattan Project Scientists)'으로 통합돼 워싱턴에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개시했다. 이 모임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원자폭탄의 위험성과 원자력의 군사적 이용이 몰고 올 파국에 대해 경고했다.

원자력의 미래를 향한 두 갈래 길

그러나 1946년 2월 16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여론을 뒤집을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핵무기 관련 기술을 포함한 비밀 정보를 소련에 넘겨주려던 22명의 스파이가 체포된 것이다. 당황한 소련은 2월 20일 서방을 무마한답시고 오타와에서 건네받으려던 정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발표하는 바람에 첩보활동을 공식적으로 시인해버리는 실수마저 저질렀다. 실제로 소련이 얻은 것이라고는 대충 정제된 우라늄 약간에 불과했지만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정치인들과 시민들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비밀이란 없다고 한 과학자들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원자폭탄에 대한 정보가 첩보 활동을 통해 소련으로 넘어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여기에 더해 1946년 2월 9일 스탈린이 5개년 경제 계획을 발표하자 미국의 여론이 비밀주의로 완전히 돌아서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트루먼 행정부는 월등한 경제력과 핵무기가 국제 정치에서 미국의 우위를 보장해준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미국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과 언젠가는 대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음에도 종전까지 소련에 적지 않은 양보를 하는 여유를 보일 수 있었다. 소련이 사실상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의 경제 개발 계획은 '자립경제 구축'을 최우선 목표로 내세웠다. 미국 주도의 경제 질서와는 분명한 선을 긋겠다는 메시지였다. 게다가 불과 일주일 만에 소련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정황까지 포착되자 군사적으로도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려 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이어 3월 초에는 소련군을 이란으로부터 철수하기로 한 미국과의 약속을 무효화하기까지 했다. 결국 미-소 관계는 급격하게 냉각됐고, 3월 5일 처칠이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을 통해 미국에 소련의 확장 정책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맥마흔 법안은 급격히 지지를 잃었다. 소련이 독자 노선을 추구하겠다면 미국으로서는 어떻게든 아주 확실한 수단, 즉 핵무기에 기반을 둔 전략적 우위를 유지해야 했다. 급변하는 정세에 밀려 SCAE는 원자력에 대해 군의 권리를 대폭 확장한 반덴버그(Arthur Vandenberg) 수정안을 채택했다. 당연하게도 과학자들은 미-소 긴장을 고착화하는 반덴버그 수정안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과학자들에게 군의 개입 이상으로 우려스러운 점은 국가 간 신뢰의 붕괴였다. 핵무기에 기반한 힘의 논리가 국제질서의 근간으로 자리 잡는다면 핵 보유국은 자신의 '비밀무기'가 유출되는 일을 막기 위해 극도로 엄격한 보안체계를 도입할 것이다. 국가간 정보 이동은 제한되고, 정책은 불투명하게 운영돼 국가간 불신이 심화될 것이다. 심지어는 만약 다른 나라가 원자력 무기를 개발한다면 그것이 독자적인 연구의 결과였다고 하더라도 '반역자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테고, 이러한 분위기는 자유와 인권을 후퇴시킬지도 모른다. 냉전 기간 내내 지속된 원자력 학계의 분위기를 보면 이러한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소련은 이미 모스크바 코앞까지 독일군이 들이닥쳐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던 1942년부터 이고르 쿠르차토프를 중심으로 핵개발 인프라를 구축하고 연구인력을 구성했다. 소련의 개발 역량은 결코 낮지 않았다. 광대한 영토에서 우라늄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으며 비탈리 긴즈부르크와 안드레이 사하로프같은 유능한 물리학자들도 충분했다. 그러함에도 냉전기간 내내 서방에서는 소련이 1945년 오타와에서 잡힌 클라우스 푹스와 같은 스파이들이 넘겨준 정보가 아니었으면 핵개발에 성공하지 못했으리라 여겼다.

▲ 소련의 핵무기 개발을 책임졌던 이고르 쿠르차토프. c.wikipedia

이에 과학자들은 반덴버그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번에도 NCAI의 광범위한 대중적 네트워크가 힘을 발휘해서 반덴버그가 애초의 수정안에서 한 발 물러서게 했지만, 이미 정치적 상황과 여론은 NCAI의 관점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NCAI로서는 원자력에 대한 민간 관리라는 기본 원칙만 갖고 있다면 어떤 법안이든 1946년 회기 내에 통과되는 것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역시나 NCAI의 견해에 따라 조율된 반덴버그 수정안은 의회에서 보수 공화파와 남부 민주당원들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국제적인 정보 교류가 국가 안보에 해로울뿐 아니라 공공의 관리라는 관념이 소련식 계획경제를 떠올린다는 이유였다. 오랜 진통 끝에 맥마흔 법안은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1946년 8월 1일 발효됐지만 이때쯤에는 초기의 법안이 갖고 있던 내용들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핵심 내용 중 하나이던 '핵무기 관련 기밀 보호'에 대한 조항은 부적절한 정보 유출에 대한 최고형을 사형으로 규정할 만큼 엄격해져서 초기안에 있던 국제주의는 완전히 증발해버렸다. 이 법안에 따라 원자력의 민간 관리를 위해 설립된 AEC도 냉전이 심화되면서 군사적 목적을 위한 연구가 주 활동영역이 됐다. 그리고 보수파 의원들이 핵무기 기술의 보안에 대해 우려했음에도, 소련은 1949년 8월 29일, 22kt급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만다. 과학자들이 우려했던 대로, 이후의 냉전은 핵무기 경쟁에 불을 붙였다.

격화되는 핵개발 경쟁

맥마흔 법안은 엉뚱한 곳에서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미국만의 단독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2차대전 기간 동안 영국이 제공한 '트윈 튜브 앨로이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추진됐다. 이를 근거로 영국은 1944년 비밀협약인 '하이드파크 협정'을 맺어 미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관련 기술을 제공받기로 했다. 당연히 종전 후 영국은 '트리니티' 관련 기술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맥마흔법이 발목을 잡았다. 최종 발효된 맥마흔법의 골자는 핵물질과 핵무기의 국외 반출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금지의 대상은 분명 적성국인 소련과 위성국가다. 그러나 미국의 우방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갓 전화에서 벗어난 유럽 국가들이 비밀을 유지할 만큼 첩보력을 지녔다고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은 기술제휴라면서 차세대 제트엔진과 같은 고급 군사 기술을 소련에 넘겨준 전력이 있는데, 이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된 미그-15가 얼마나 많은 미군기를 떨어뜨렸는지 생각해 보면 미국의 우려에는 충분히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우방국을 정보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하는 '2류 국가' 취급하는 처사였다. 자신들이 2차대전 승전에 상당한 지분을 차지한다고 자부하면서 콧대를 높이던 영국과 프랑스 입장에서는 참기 힘든 모욕이었다. 영국의 배신감은 특히 더했다. 맥마흔법이 하이드파크 협정을 완전히 무시한 꼴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미국에 대한 기대를 접고 우라늄이 풍부한 영연방 국가인 호주와 함께 독자적으로 핵개발을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은 맥마흔법안의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 스파이인 클라우스 푹스로부터 핵실험 데이터와 우라늄 농축방법, 폭축렌즈 설계도와 같은 핵심 정보를 입수함으로써 시행착오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덕분에 영국은 1947년 셀라필드 원자력 단지를 건설해 본격적으로 군사용 목적의 우라늄 재처리를 시작한 데 이어 1952년 세 번째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핵보유국이 된 이후 영국은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외교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1958년에 이르면 아예 미-영간 상호 핵무기 개발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영국이 핵무기 기술에 분명한 지분을 지녔음에도 배제당한, 나름 억울한 사례라면 프랑스는 오직 자존심만으로 밀어붙인 경우에 해당한다. 2차대전 동안 프랑스는 영국보다 못한 취급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의 절반은 독일이 직접, 절반은 독일의 괴뢰정부가 점령한 상황에서 샤를 드 골이 세운 망명정부만으로는 유의미한 활동을 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소수의 프랑스 과학자들이 참여했지만 중수로 건설이나 플루토늄 분리와 같은 '잡일'을 맡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만 이 소수의 프랑스 과학자들이 구체적인 정보에 접근하기는 어려웠지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왜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가 미국의 저지를 뚫고 1944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하면서, 프랑스 내부에서도 핵개발의 필요성이 공식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 프랑스를 핵보유국으로 만든 샤를 드 골 대통령. c. wikipedia

임시정부 수반인 샤를 드 골은 과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1945년 10월, 핵폭탄 개발을 비밀리에 명령하고 이를 추진할 프랑스 원자력위원회를 설치했다. 당연히 이 계획은 미국과 영국에서도 훤히 알고 있던 터라 미국, 영국, 캐나다 3국이 우라늄공급통제조약을 맺어 프랑스가 양질의 우라늄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그러나 프랑스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남부에서 대규모 우라늄 광산이 발견된 덕분에 독자적인 핵개발을 지속할 수 있었다. 1956년의 제2차 중동전쟁을 거치면서 프랑스는 핵무기 개발에 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아랍국가 연합과 이스라엘이 격돌한 이 전쟁에서 프랑스와 영국은 이스라엘의 편에 서서 개입했다. 이들은 효율적인 전략으로 이집트를 거의 점령할 뻔하지만 소련이 이집트를 본격적으로 지원하면서 일이 꼬이고 만다. 소련은 이스라엘과 영국, 프랑스에 이집트에서 얌전히 철수하지 않으면 제한적으로나마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사실상 다 이긴 전쟁을 포기하라는 뻔뻔한 요구였다. 당연히 영국과 프랑스는 크게 반발하며 끝까지 싸우겠다고 버텼지만 미국이 소련에게 동조하는 바람에 이집트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소련이 정말로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그나마 핵무기 양산체제를 앞두고 있어 와신상담하는 셈치고 이런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이 줄어드는 와중에 핵개발에 한참 뒤처진 프랑스는 무척이나 조급해졌다. 이미 드 골 대통령은 프랑스가 종이호랑이임을 실감하고 있었다. 공산진영에 대항해 결성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미국, 영국, 프랑스의 3강 체제로 구성하자고 제안했다가 핵무기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던 것이다. 결국 프랑스는 대외정책의 일환으로 노골적인 핵개발을 추구했다. 강력한 외교적 지렛대를 지닌 경쟁자가 또 하나 늘어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미국과 소련은 물론, 초강대국이 또 하나 늘어나는 것이 달갑지 않은 국제연합 회원국들이 프랑스의 핵개발 포기를 종용하고 나섰다. 그러나 프랑스는 요지부동이었다. 프랑스의 고집은 1960년 2월 알제리에서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하며 네 번째 핵보유국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보답을 받았다.

공멸을 전제로 한 억지력

여기서 프랑스가 왜 그렇게나 핵무기에 집착했는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핵무기의 의의는 '우리를 너무 괴롭히면 당신도 도시 몇 개쯤 사라질 각오를 해야 할 겁니다'로 요약할 수 있다. 상대방도 예상치 못한 한 방으로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단을 갖춤으로써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개념이다. 미-소 양국은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며 '유연반응전략'에 따라 상호 핵무기 사용을 자제해 왔다. 유연반응전략이란 만약 상대가 핵무기를 한 발 쏘면 그에 비례해서 이쪽도 한 발 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전략은 상대방의 보복을 충분히 예측하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미-소간 극단적인 수단을 회피하게 했다. 그런데 이러한 전략으로는 미-소 양국의 국토가 아닌 전장에 적당한 위력의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막지 못한다. 오히려 '상대방 영토만 공격하지 않으면 되니 다른 곳의 전장에는 써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전술핵 사용에 따르는 저항감을 낮출 가능성도 있다.당장 소련과 전쟁이 발발하면 주전장이 될 프랑스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만약 프랑스가 미-소만큼은 아니라도 상대방에 '매운맛'을 보여줄 수준의 핵무기를 보유한다면 어떨까? 미국과 소련도 프랑스 영토에 핵무기를 사용하는 일은 심각하게 재고할 것이다. 유럽이 또다시 전화에 휩쓸리더라도 핵공격으로 초토화되는 상황만큼은 피할 수 있다. 영국이야 이미 약속한 것을 돌려받는 입장에 가까웠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프랑스의 강경한 태도는 미국 입장에서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캐나다와 영국까지 끌어들여 적극적으로 방해했음에도 프랑스는 기어이 핵개발에 성공해서 불과 15년 사이에 핵보유국이 네 개로 늘어났다. 미국이 원자력 기술을 아무리 틀어쥐고 관리한다 한들 핵무기 확산을 막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실이 분명해졌다. 제아무리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라는 취지하에 원자력발전소와 같은 평화적인 이용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한들, 핵무기를 외교적 협상과 위협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상 핵개발 수요는 늘 있기 마련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국가가 일단 핵개발을 마음먹으면 저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마침내 중국마저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하자 이대로 핵무기의 확산을 내버려둬서는 곤란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 연설 이후, 국제사회에서는 핵무기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논의는 1956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설립으로 이어져 핵무기 및 관련 기술의 이동을 감시하고 평화적 목적의 원자력 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어 1957년에는 아일랜드 외무상인 프랭크 아이켄(Frank Aiken)의 제안에 따라 '핵비확산'의 기본 원칙이 확립되기에 이른다.

핵무기가 확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자리잡음에 따라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을 지원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설립됐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에서 봤듯, 국제적인 여론이 무색하게도 강국들은 외교적 지렛대로 활용하고자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술 발전에 따라 핵개발도 수월해져서 1960년대에 이르면 우라늄과 실험장만 있으면 핵무기 개발은 시간문제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미소 양국은 18개국이 참여하는 군축회의(ENDC)를 결성해서 핵무기 확산을 제한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조약의 초안은 1965년, 미국이 제출했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조약의 초안에 영국과 캐나다가 살을 붙여 '기존 핵 보유국의 핵무기 보유는 인정하되 더 이상의 핵 확산은 금지한다. 또한 핵 보유국은 점진적으로 핵무기를 감축한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이 두 가지 원칙이 바로 현재 NPT의 핵심 내용인 핵비확산(Non-proliferation)과 핵감축(disarmament)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핵비확산'이다. 이는 핵무기나 관련 재료, 기술이 비핵국가에 전달되지 않게 하는 것뿐 아니라 핵국가가 비핵국가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음을 뜻한다. 프랑스가 핵개발에 매달린 원인 중 하나는 '강한 프랑스'에 대한 집착도 있었지만 유사시 프랑스 영토에 핵공격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핵무기의 위협에서 안전을 보장받고자 핵무기를 보유하려 한 것'이다.

따라서 핵비확산을 관철하려면 비핵보유국이 핵무기를 위협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핵무기가 없어도 핵공격의 위협이 없다면 핵무기를 보유해봐야 국제사회의 비난으로 잃을 것이 더 많으므로 자연스레 핵개발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여기에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기술이 활성화돼서 당장 경제성장에 도움도 안 될 핵무기를 개발하느니 발전소를 하나 더 건설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 상식으로 여겨진다면 굳이 기를 쓰고 정보를 통제하지 않아도 핵무기가 확산될 위험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신뢰에 기반을 둔 국제질서

이는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맥마흔 법안부터 프랑스의 핵개발에 이르기까지, 국제정치는 긴장감 팽배한 불신을 기반으로 움직였다. 핵개발 레이스는 상대보다 우위에 서려는 경쟁 이상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위협으로부터 자위수단을 갖추려는 노력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NPT의 핵비확산 원칙은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핵개발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한다. 오히려 핵무기를 보유할수록 '핵공격을 당하지 않는다'는 특혜에서 벗어나게 되니 핵무기의 위협에 노출되는 꼴이 된다. 종합적인 국력이 충분치 않다면 핵무기 보유가 오히려 국가의 발전에 독이 되는 것이다.

종종 핵보유국을 기존 다섯 국가로 제한했다는 점에서 핵비확산 원칙을 '기존 핵보유국의 사다리 걷어차기'로 폄하하곤 하는데, 비핵국에 대한 공격 금지 조항을 고려하면 지나친 해석임을 쉽게 알 수 있다.현대의 국제정치에서 핵무기의 유무가 국가의 발언력이나 외교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초안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줄다리기를 거쳐 1967년 8월, 마침내 미-소간 NPT에 대한 합의가 완료되고 1968년 7월 1일, 미국, 소련, 영국과 비보유국 53개국 대표에 의해 뉴욕에서 체결됐다. 첫 조인 당시에는 후발주자 핵보유국인 프랑스와 중국이 빠졌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냉전이 종식되면서 세계 각국이 속속 참여해 현재의 NPT에 기반한 국제정치 질서를 형성했다. NPT는 여러 가지 모순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십년 동안 핵확산을 제한된 선에서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성과를 냈다. 특히 유럽과 동아시아의 선진국,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핵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국가들의 핵무기 보유를 억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 IAEA는 규제기관에 그치지 않고 평화적 목적의 원자력 연구에서 국제 협력의 창구로 기능해 왔다. 핵무기 개발의 억제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맨해튼 프로젝트 과학자들의 구상이 형태는 많이 다르나마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원칙으로 자리잡은 셈이다. NPT의 현재는 대결보다는 협력을, 무력보다는 평화를 추구하며 함께 번영하는 길을 모색하려 한 맨해튼 프로젝트 과학자들의 이상은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수많은 국가들이 서로 긴밀하게 얽힌 오늘날에는 더 그러하다. NPT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지금, 과거 어느 때보다 극단적인 갈등 없이 번영을 지속하는 시대를 만들어낸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