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신뢰의 기술, 블록체인
핵비확산 더욱 공고히 할까

기술의 발전은 우리 삶뿐만 아니라 국제 안보 환경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이전에는 기술적 한계로 인해 실현하지 못했거나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핵비확산 분야에도 최신 기술을 반영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려는 연구가 활발하다. 블록체인 기술은 우리에게 암호화폐인 '비트코인'을 뒷받침하는 기술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운송, 금융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게 쓸 수 있는 유망한 기술이다. 이런 블록체인 기술이 핵확산 위험을 줄이는 데에는 어떻게 쓰일 수 있을지 살펴보자.

블록체인은 정보를 모든 사용자에게 분산 저장하기 때문에 쉽게 변조 여부를 확인할 있어 신뢰의 기술로 불린다. ©shutterstock

블록체인은 다른 말로 '분산원장' 기술이라고 한다. 데이터가 기록된 '블록'을 네트워크에 연결된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분산) 저장하고 관리하는 기술이라는 뜻이다. 블록체인에서 데이터는 해시 함수를 이용해 암호화되고, 암호화된 데이터들이 묶여 하나의 블록이 된다. 블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연결된 사슬(체인)의 구조로 저장된다. 해시 함수의 특성상 데이터 중 단 한 부분만 변경되더라도 모든 값들이 변경되고, 분산 저장된 정보가 사용자들에게 모두 나눠서 저장되기 때문에 데이터가 위조된다 하더라도 다른 사용자들이 갖고 있는 정보와 비교해 위·변조 여부의 검증이 가능하다. 사실상 데이터의 위·변조가 불가능한 셈이다.

이처럼 블록체인은 중앙적 권한이나 중개자 없이도 데이터를 투명하고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고, 공유되고 있는 데이터에 대한 높은 신뢰를 갖게 할 수 있어 '신뢰의 기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핵 군축과 국제 사회의 신뢰, 블록체인으로 향상

2020년 11월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의 과학안보연구센터는 블록체인의 '신뢰성'을 이용해 핵 군축 문제 해결을 제안하는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현재 전 세계 국가들은 핵 위험을 줄여야 하는 중요한 과제와 씨름하고 있지만, 몇몇 국가들의 신형 핵무기와 핵탄두, 탄도미사일 등의 개발로 국제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핵 군축을 진전시키려는 노력을 방해하고 있다. 연구팀은 이러한 상황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강력한 다자간 검증 방법을 개발한다면 국가들 사이의 신뢰를 회복하고 핵 군축 의무를 이행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IAEA 사찰단의 검증 모습. 핵 군축 검증 과정에서 민감 데이터 관리와 국제 사회의 신뢰가 필수적인데,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 이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IAEA

핵 군축 과정에서는 핵무기의 상태와 위치, 현장 검사의 세부사항 및 관련 시설의 상태 등 다양하고 민감한 정보들이 생성되고 기록된다. 연구팀은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면 이러한 민감 데이터를 암호화해 보관하고, 통제할 수 있는 동시에 매우 안전하게 영구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앙집권적 권한이 필요치 않으므로 협상 과정 및 운영비용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위·변조 위험이 없어 검증 과정에 대한 신뢰를 쌓을 수 있기 때문에 향후 협력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과거에는 핵 기술 확산을 우려해 핵 군축 과정에 핵무기 비보유국이 참여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면 핵 확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보를 드러내지 않고도 핵물질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핵무기 비보유국과 같은 제3의 국가가 핵보유국의 핵 군축에 대한 정보를 검증할 수 있도록 해 국제 신뢰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블록체인 기술을 사물인터넷에 접목하면 원격으로 핵 군축 정보에 대한 실시간 모니터링을 할 수 있고, 조약을 위반할 경우 자동으로 경고를 알릴 수도 있다.

핵물질 계량관리 및 통제를 위한 블록체인 플랫폼 'SLAFKA' 개요도(오른쪽 그림). 정보가 수직적으로 올라가는 과거 방식(왼쪽 그림)과 달리 수평적으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핀란드 방사선 원자력안전청

실제로 최근 몇 년간 핵 군축 및 핵물질 계량관리 검증에 블록체인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2020년 3월, 핀란드 방사선원자력안전청(STUK)은 세계 최초의 핵물질 계량관리를 위한 블록체인 플랫폼 프로토타입 'SLAFKA'를 공개했다. 원자력 시설의 데이터에 기초해 이해관계자 간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실증함으로써 계량관리의 효율성과 투명성, 신뢰도를 높이는 블록체인 기술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 목표다. 지금까지는 IAEA의 안전조치를 수행하는 과정의 각종 기록이 원자력 시설을 보유한 사업자에서 규제기관으로 상향 보고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보고되는 수직적인 시스템이었다. 이 시스템은 변조에 취약하고 일부는 여전히 종이 문서로 기록되기 때문에 보존도 어렵다. 반면에 SLAFKA를 이용하면 원자력 시설 사업자가 블록에 계량관리 내용 및 안전조치 이행 여부를 기록하고, 방사선원자력안전청과 IAEA는 언제든지 이를 확인하고 감독할 수 있어 신뢰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핵물질 운송 방호에도 유용한 블록체인 기술

미국 스팀슨센터의 연구팀도 2019년부터 핵안보에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는 연구를 수행해 왔다. 연구팀은 2020년 6월 보고서를 통해 핵물질 계량관리를 비롯해 내부자 위협, 핵물질 운송 추적 등 핵안보에 있어 블록체인 기술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제시했다.

핵물질 계량관리에서 생산된 데이터는 안전조치(Safeguards) 이행의 기반이 되는 동시에, 물리적방호에 도움이 된다. 핵물질의 양, 유형, 위치 등에 관한 정보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원자력 시설 내 또는 시설 간 핵물질의 흐름에 관한 정보와 활동을 블록체인으로 관리한다면 보안성이 높아질 것이며, 해당 이해관계자들 사이에 정보 공유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블록체인의 특성상 어떤 시점, 시간대에 어떤 핵물질이 어디에 있는지 특정해 보여줄 수도 있다.

블록체인 기술은 데이터 및 정보 관리에 특화돼 있어 핵물질 운송 방호에도 쓰일 수 있다. ©shutterstock

스팀슨센터 연구팀은 특히 블록체인 기술이 운송 방호에 유용할 것으로 전망했다. 핵물질은 운송 시 상대적으로 보안에 취약하다. IAEA에 따르면 1993년부터 2019년까지 방사성 물질 도난 사고의 절반 이상이 운송 과정 동안 발생했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면 핵물질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핵물질의 위치에 대한 구체적이고 민감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고, 운송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활동도 모니터링할 수 있다.

또 필요한 정보만을 해당하는 사람에게 전달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핵물질 양에 관한 정보는 원자력 시설 운영자와 규제기관에만 전달하고, 경로와 운송 시간은 트럭 운전자나 항만 직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미 다이아몬드와 식품 분야에서는 운송 경로를 추적하기 위해 블록체인이 활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블록체인 기술은 핵비확산과 핵안보에 혁신을 가져올 수 있다. 블록체인 기술은 업무 효율을 높이고, 과정을 간소화하면서도 강력한 보안 체제를 유지하는 기술적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블록체인 기술의 도입은 아직까지 개념적인 연구와 초기 아이디어 제시 정도에 불과하다는 한계가 있다. 핀란드의 사례처럼 블록체인을 실제로 적용해보며 기존의 시스템과 매끄럽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 등을 알아보는 실험과 추가 연구들이 더 수행되어야 한다.

또 블록체인의 핵심은 입력된 데이터를 위·변조의 위험 없이 관리하고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용자는 블록체인 상의 정보가 정확한지 확인하고, 공유될 정보의 유형과 조건을 설정하는 등의 물리적 작업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추가적인 연구에 더불어 정부, 규제 기관, 원자력 시설 보유자 등 핵안보와 핵비확산을 실천하는 전문가들의 논의와 평가 또한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이 자리를 잡아 핵비확산 및 핵안보 이행이 한층 더 진전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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