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스토리

소련의 핵무기 개발자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기까지,
안드레이 드미트리예비치 사하로프

냉전이 한창이던 1961년, 소련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핵무기로 꼽히는 '차르봄바' 폭발 실험에 성공했다. 뒤처져있던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은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소련의 핵물리학자 '안드레이 드미트리예비치 사하로프'다. 인류 최악의 살상 무기를 개발한 그가 어떻게 평화의 수호자가 됐는지 살펴보자.

'소련식 수소폭탄'을 설계해 미국을 앞지르다

사하로프는 1921년 5월 21일,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물리학 교사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디미트리 사하로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1938년 모스크바국립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후 독소전쟁(제2차 세계대전 중 일어난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발발한 1941년 졸업했다.

성적이 우수했던 사하로프는 곧장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울리야놉스크의 한 군수공장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자세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애국심이 뛰어난 그가 자원병 선발에 떨어지자 무기 제조에 힘을 보탰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하로프는 이 시기 소련의 저명한 과학자인 이고리 예브게니예비치 탐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45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탐의 지도로 소련과학아카데미 내 레데베프물리연구소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았고, 불과 2년 후인 1947년 핵융합 이론에 관한 연구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듬해 사하로프는 소련의 핵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핵무기 개발에 발을 담그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스탈린의 승인에 따라 비밀리에 추진됐는데, 전쟁 말미 미국이 원자폭탄의 위력을 드러내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사하로프를 비롯해 그의 스승인 탐과 이고리 쿠르차토프 등 소련의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동원됐다.

당시 소련과 미국의 목표는 원자폭탄보다 강한, 이른바 '슈퍼폭탄'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소폭탄이 고안됐다. 수소폭탄은 원자핵에서 중성자가 이탈할 때 방출되는 에너지를 쓴다는 점에서 원자폭탄과 비슷하지만, 중성자를 방출하기 위해 핵분열이 아닌 핵융합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원자폭탄은 농축된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의 원자핵에 외부에서 보낸 중성자를 충돌시켜 양성자와 붙어있던 중성자를 밀어내는 방식이다. 이때 떨어져 나간 중성자가 다른 원자핵에 부딪혀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반면 수소폭탄은 수소보다 중성자가 많은 중수소(양성자1, 중성자1)와 삼중수소(양성자1, 중성자2)를 융합시켜 헬륨(양성자2, 중성자2)을 만듦으로써 잉여 중성자 1개를 내보낸다. 튀어나온 중성자는 수소폭탄 내부에 탑재된 우라늄의 핵분열을 유도해 폭발력을 증폭시킨다.

재밌는 점은 핵융합에 필요한 고온·고압 환경을 만들기 위해 수소폭탄 내부에서 원자폭탄을 터뜨린다는 것이다. 즉, 수소폭탄은 핵분열을 방아쇠 삼아 핵융합, 핵분열을 연쇄적으로 일으키는 원리다. 사하로프는 1949년 그의 동료 비탈리 긴즈버그와 함께 독자적으로 수소폭탄을 설계하고, 이를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소련은 원자폭탄에 이어 수소폭탄 개발 경쟁에서도 미국의 등을 봐야 했다. 미국은 1951년 헝가리 출신 미국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와 폴란드 수학자 스태니슬로 울람이 고안한 '텔러-울람' 설계를 이용해 수소폭탄을 만들었고, 1952년 폭발 실험에 성공했다. 이는 인류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이다. 다만 미국의 수소폭탄은 액체 상태의 중수소를 사용했기 때문에 별도의 냉각장치가 필요했고, 폭격기에 싣기에는 너무 컸다. 이에 소련은 사하로프와 긴즈버그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고체 상태의 리튬중수소 화합물을 이용한, 작고 취급하기 쉬운 수소폭탄을 개발했다. 폭발 실험에 성공한 시점은 미국보다 1년 늦은 1953년이다.

러시아 사로프 핵무기 박물관에 전시된 차르봄바 프로토타입 모형. ⓒwikimedia

이 단계에서 소련의 수소폭탄은 위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8년 후인 1961년 폭발력을 키운 새 수소폭탄 '차르봄바' 폭발 실험에 성공하면서 점점 완성형에 가까워졌다. 차르봄바는 원자폭탄의 약 3,800배에 달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어 지금까지도 인류가 만든 가장 강한 핵무기로 꼽힌다. 수소폭탄 개발 성공은 사하로프를 소련의 스타과학자로 만들었다. 그는 1953년 32살의 나이로 소련과학아카데미 최연소 회원이 됐고, 소련 정부로부터 스탈린상과 레닌상,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가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린 시기도 이 무렵이다.

핵무기 개발자, 체제의 자유와 인권을 외치다

사하로프가 소련으로부터 받은 명예를 그대로 누리다 생을 마감했다면 '핵무기 개발자'라는 타이틀만 붙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의 이름은 인권과 맞닿아 있다. 유럽의회는 1988년부터 매년 인권과 자유 수호에 커다란 공헌을 한 개인이나 단체에 상을 수여하고 있는데 이 상의 이름이 바로 '사하로프상'이다.

사하로프가 뛰어난 핵물리학자였다는 건 분명하지만, 처음부터 핵폭탄 개발을 지지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역시 그가 속한 연구팀이 프로젝트의 비밀연구팀에 포함되면서 참여하게 됐고, 개인적으로는 거절했다는 얘기가 있다. 사하로프가 차르봄바 실험 전인 1958년 소련 정부에 핵실험을 중단하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낸 것을 보면 적어도 이때부터는 핵폭탄에 회의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마 핵폭탄 실험 중에 발생한 방사성 낙진 문제와 인명사고를 지켜본 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 정부가 그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던 탓인지 사하로프는 1963년 미국과 소련이 핵실험금지조약을 맺은 후에도 정부에 핵실험을 재개하지 말 것을 거듭 요청했고, 나아가 스탈린의 독재 체제를 비판하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친선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1968년에는 진보적 평화주의 사상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뉴욕타임스 1면에 보도되며 소련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1988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만난 사하로프. ⓒWhite House Photographic Collection

사하로프는 반체제적인 행동 때문에 소련아카데미회원을 제외한 모든 직위에서 강등당했으나 굴하지 않고 오히려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70년에는 인권위원회를 결성해 이스라엘에 이민하려는 유태계 소련인을 돕고, 사형제 폐지 등을 주장했다. 이 공로로 그는 197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이는 전 세계가 그를 인권운동가로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소련의 체제를 부정한 대가는 컸다. 사하로프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등의 활동을 지속하자 소련 당국은 1980년 1월 국가에 대한 반역을 이유로 사하로프를 거리에서 체포해 고르키시로 추방했다. 그의 유배 생활은 고르바초프 정부 시절이던 1986년에서야 끝났는데 불과 3년 후인 1989년 말 사하로프는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이처럼 사하로프는 놀라운 결단력과 용기로 체제에 저항하고, 인권운동에 앞장섰다. 2021년은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요즘과 같이 인권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본인의 이익만을 위한 선택이 더 많아진 세상에서 사하로프의 삶은 우리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다운로드
Share on Facebook Share on Naver Share on kakaostory Share on Twitter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