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비확산 FOCUS KINAC이 주목하는 핵비확산 이슈

무뎌진 칼날을 갈다, 미국 핵태세검토보고서

▲ 미국 국방부가 발표한 핵태세검토보고서 발표 현장. 사진 출처 : 미국 국방부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말은 공허한 외침이었다."

지난 2018년 2월 2일, 미국 국방부가 발표한 핵태세검토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 NPR) 발간이 가지는 의미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 말이다. 냉전 이후 핵무기를 줄여나가려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다시 핵무기 경쟁 체제가 도래할 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수만 명의 체코 시민 앞에서 전세계를 대상으로 "핵무기 없는 세상" 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지 10년 만의 일이다.

▲ 핵태세검토보고서 표지. 사진 출처 : 미국 국방부

핵태세검토보고서는 미국 안보 체제에서 핵무기의 역할과 무기 시스템에 대해 다룬 보고서다. 한반도 긴장 상태가 최고조에 이르던 1994년에 처음으로 발간된 이래, 매 8년마다 갱신돼 발간되고 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중장기 핵전략을 담은 만큼 이 보고서가 국제질서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특히 이번 보고서에 대해서는 러시아, 중국, 일본이 즉각 공식 입장을 발표하는가 하면 각국의 학계와 싱크탱크에서 분석을 쏟아내는 등 관심이 뜨겁다. 201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 역시 즉각 반대성명을 발표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정치권, 학계, 언론계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번 보고서에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는 미국의 핵전략의 기조 변화가 예견되기 때문이다. 2010년 발표한 보고서는 두 가지 핵전략을 천명했다. 미국이 직접적인 핵 공격을 받는 것과 같은 극한상황(extreme circumstances)이 아니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핵비확산조약(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NPT)을 준수하는 비핵국가를 상대로는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약속'의 성격을 지녔으며, 이 약속이 불안정한 국제정세에도 불구하고 핵비확산이라는 원칙이 굳건히 유지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상대방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보장이 있다면 이쪽에서도 외교적인 마찰과 고립을 무릅쓰면서까지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늘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 핵무기 투사가 가능한 미국의 B-2 스텔스 전략폭격기. 사진 출처 : 미국 국방부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핵태세검토보고서에서는 미국의 태도 변화가 감지된다. 보고서에는 핵공격을 받지 않은 상황이거나 비핵국 상대로도 극한 상황일 경우 핵무기로 대응할 수 있다는 전략이 추가됐다. 이와 함께 소규모 국지적 분쟁에 이용할 수 있는 전술 수준의 소형 핵무기와 투발수단도 적극적으로 확보하겠다는 계획이 담겼다.

미국의 변화는 냉전 해체 이후 강대국 간 전면전 위험은 현저히 줄어든 반면, 테러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저강도 국지분쟁은 늘어난 데 따른 것이다. 핵무기라는 말을 들으면 으레 대륙간탄도탄처럼 파괴력이 극히 높은 전략핵무기를 떠올린다. 이러한 전략무기는 과거 소련과 같은 국가에 대해서는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어느 한 쪽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공멸할 뿐이라는 '상호확증파괴'라는 전략을 통해 핵보유국끼리 선제 핵공격을 하지 않도록 자제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쟁의 규모가 제한되고 분쟁 당사자가 잃을 것이 별로 없는 경우가 많은 저강도 국지분쟁에서는 전략핵무기의 억지력이 발휘되기 어렵다. 따라서 변화된 전장 환경에 맞춰 적당한 파괴력의 핵무기를 활용함으로써 인적 피해도 줄이고 소규모 분쟁에 대한 억지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 이번 보고서에 담긴 미국 핵전략의 골자다.

보고서에 담긴 핵전략은 군사적, 정치적 시각에서 보면 논리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국제외교의 문제로 넘어오면 비판받을 여지가 크다. 미국의 전략은 핵무기가 실제로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비핵보유국이라도 상황에 따라 핵공격을 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이는 핵무장을 확대하거나 새로 핵무기를 보유하려는 국가에게 좋은 빌미가 된다. 미국과 적대적인 국가 입장에서는 언제 핵공격을 당할지 모르니 자위적 차원에서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고, 역으로 이러한 움직임이 가시화되면 핵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미국의 우방국도 핵무장 카드를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불신의 확대재생산으로 인해 핵비확산의 기반인 상호 신뢰가 무너지는 셈이다.

이번 보고서가 지닌 중요성으로 인해 2020년에 개최될 핵확산금지조약(NPT) 검토회의에서도 핵심 의제로 논의될 전망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NPT라는 대합의는 핵보유국은 핵감축에 최선을 다하고, 비핵보유국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다는 상호 약속과 신뢰에 기반을 둔다. 핵보유국이 NPT 리뷰 회의를 통해 비핵국에게 핵무기 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지속적으로 약속해 온 이유도 신뢰를 재확인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2020년 회의에서도 동일한 약속이 이어질지, 어떤 결론이 나올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미국의 핵전략 변화가 NPT 체제에 큰 혼란을 초래할 것임은 분명하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현재의 균열은 어디까지나 군사전략 차원의 문제고 예측일 뿐, 민간과 외교 분야에서의 협력은 아직 견고하다는 것이다. 국제적 핵물질 감시 체제나 전략물자 규제와 같은 핵확산 방지 체계는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으며 쉽게 무력화되지도 않을 것이다. 당장 '무한 핵무기 경쟁 시대'가 도래한다거나 '핵무기 개발 레이스'가 펼쳐지는 위험천만한 사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핵무기 확산이 위험하다는 사실에는 세계의 어느 나라든 공감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같은 때일수록 핵물질 통제와 관리의 중요성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핵전략이 본격화된다면 핵보유국이 더 많은 핵무기를 만드는 것은 아마 현실적으로 막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비핵국가가 새로이 핵무기를 보유해서 핵전쟁 위험성이 커지는 일은 수출입 통제와 국가 간 협력과 같은 현재의 국제협력을 통해서도 예방할 수 있다. 평화적 이용을 위한 기술지원과 노하우 전수를 강화함으로써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군사전략 분야에서 생긴 핵비확산 체제의 균열을 외교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봉합할 수 있는 방법이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맞춰 우리나라도 철저한 분석과 대비가 필요하다. 보고서에서는 북한이 핵미사일로 미국을 타격하는 능력을 갖추는 데까지 이제 겨우 몇 달 남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평화적인 해법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국제정세는 긴장과 평화가 공존하는,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이런 시국에서는 우리 안보를 최우선으로 두되 평화롭게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이 핵무기 레이스에 있지는 않을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