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스토리

핵물리학의 아버지, 어니스트 러더퍼드

한 국가의 지폐에 얼굴이 새겨진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우리나라의 지폐에는 세종대왕, 신사임당과 같은 역사책에 나오는 위인들과 발명품, 작품들이 그려있고 미국의 지폐에도 큰 업적을 남긴 역대 대통령이나 인물이 담겨있다. 이렇게 지폐에 그려진 인물은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큰 업적을 세운 사람들이다. 뉴질랜드 100달러 고액지폐 속에는 누가 있을까? 바로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다. 과연 그는 어떤 업적을 남겼기에 뉴질랜드의 역사 속에 길이 남을 사람이 되었을까?

뉴질랜드 100달러 지폐에 새겨진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초상화. ©나라옥션

뉴질랜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1871년 8월 13일, 뉴질랜드의 시골 마을 스프링 글로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제임스 러더퍼드는 평생 그 마을에서 생활한 노동자 출신으로 작물 마(麻)의 배양에 성공한 사업가였다. 어머니 마사 러더퍼드는 당시 뉴질랜드에서는 매우 드물었던 여교사 중 한 명으로 러더퍼드의 교육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889년 러더퍼드는 뉴질랜드 대학의 캔터베리 칼리지에 입학했다. 뉴질랜드 각지에서 상경한 우수한 인재가 모인 칼리지에서 러더퍼드는 그리 특출난 편은 아니었다. 성적은 좋은 편이었지만 특별한 천재라는 인상은 없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한 가지 목표를 정하면 절대 양보하지 않는 고집이 센 아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고집은 평생의 자산이 된다.

21살의 어니스트 러더퍼드. 물리학에 대한 열정으로 연구와 실험에 몰두했다. ©Encyclopedia of Trivia

뉴질랜드 대학을 최고 성적으로 졸업한 러더퍼드는 고등학교 때부터 꿈이었던 물리학을 공부하고자 1895년 24살의 나이에 장학금을 받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한다. 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뉴턴이 재직했던 곳으로 유명한 케임브리지 대학은 그 명성답게 당대 최고의 물리학 연구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트리니티 칼리지의 원자연구소는 전자기학을 개척한 맥스웰이 초대 소장을 맡은 곳으로 영국 물리학 연구의 심장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러더퍼드가 원자연구소에 도착했을 때, 연구소의 소장은 물리학자 J.J. 톰슨이었다. 톰슨은 38살의 젊은 나이에 소장을 맡을 정도의 천재였다. 전 세계에서 모인 천재들이 톰슨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원자 연구에 매진하던 시기에 러더퍼드는 뉴질랜드라는 변방 출신의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러더퍼드의 진가가 빛을 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수재는 아니었지만 한번 목표를 정하면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러더퍼드의 자세는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한다.

당시 톰슨의 관심사는 물질의 기본구조를 밝히는 작업이었다. 화학 반응 연구를 통해 물질이 여러 종류의 원자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 내부 구조는 수수께끼인 채 남아있었다. 톰슨은 유리관에 가스를 주입한 가스관에 X선을 쬐면 전기가 강하게 흐르는 현상이 원자 내부 구조를 밝히는 데 힌트가 되리라 생각하고 러더퍼드에게 가스관 연구를 지시했다. 톰슨과 러더퍼드의 연구팀은 1897년, 가스관 내부에서 전기를 운반하는 물질을 발견하고 '전자'라 이름 붙였다. 전자 발견에 공헌한 러더퍼드는 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톰슨에게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는다. 이듬해 러더퍼드는 맥길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어 캐나다로 향한다.

방사성 붕괴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마침내 원자핵을 발견하다

맥길 대학 시절 실험실에 앉아 있는 어니스트 러더퍼드. 방사성 붕괴를 밝혀내 물리학계의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wikipedia

맥길 대학에서 새로운 연구팀을 이끌게 된 러더퍼드는 정력적인 연구 활동을 이어나갔다. 당시 원자물리학에서는 퀴리 부부가 발견한 유도방사선 효과와 영국의 크룩스가 발견한 우라늄X가 화두였다. 유도방사선 효과는 토륨이나 라듐에서 나온 가스와도 같은 물질이 주변 사물에 방사선을 옮기는 현상을 말한다. 우라늄X는 우라늄 속에 존재하는 수수께끼의 물질로 우라늄에서 우라늄X를 제거하면 우라늄 속에 우라늄X가 다시 생겨나는 현상이었다. 두 현상을 종합한 러더퍼드는 '혹시 방사선이란 원소가 다른 원소로 변할 때 방출하는 무언가가 아닐까'라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공전하는 러더퍼드 원자 모형 그림. ©Britannica

이때부터 러더퍼드의 연구팀은 이 아이디어를 실제로 증명하는 실험에 매진한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인재로 구성된 연구팀은 캐나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방사성 붕괴를 일으킨 라듐이 철로 변하는 일련의 과정을 밝혀낸다. 하나의 원소가 다른 원소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러더퍼드는 일약 세계 물리학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으로 적을 옮긴 러더퍼드는 그곳에서 만난 독일 출신 물리학자 가이거의 도움을 받아 알파입자의 개수를 정확히 세는 데 성공한다. 알파 입자는 라듐에서 방출된 방사선을 담은 유리관을 진공 상태에 놓으면 목격되는,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입자였다. 이 덕분에 알파입자의 성질이 헬륨 원자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러더퍼드는 알파입자가 전자를 포섭하면 헬륨 원자로 변한다고 발표했다. 이 연구의 공적을 인정받아 1908년 러더퍼드는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알파입자들은 무거운 원자들이 알파 붕괴하면서 방출한 것들이었다. 원자가 붕괴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러더퍼드는 원자 내부의 구조를 밝혀내기 위해 금속판에 알파입자를 부딪치는 충돌 실험을 했다. 그러자 매우 드물게 알파입자를 쏜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알파입자를 반사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를 발견한 러더퍼드와 그의 연구팀은 1911년에 마치 태양계와 같이 원자의 중심에는 원자핵이 위치하고 그 주변을 전자가 공전한다는 러더퍼드 원자 모형을 발표했다.

그가 길러낸 핵물리학의 수많은 제자들, 무기의 씨앗이 되기도

캐번디시 연구소는 영국 최고의 물리학 연구소로, 이곳의 연구소장으로 취임한다는 것은 곧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로 인정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917년 러더퍼드는 스승 톰슨의 뒤를 이어 캐번디시 연구소의 소장에 취임한다. 당시 세계는 전화에 휩싸여 있었다. 세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영국은 막대한 피해를 보았으며 러더퍼드의 연구소도 물질적인 손해를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는 거의 예외 없이 징병 되었다. 전쟁통에도 러더퍼드는 적국에 있는 물리학자와 중립국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물리학 연구를 우선했다.

핵물리학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캐번디시연구소 멤버들과 함께. 왼쪽부터 일곱 번째에 있는 사람이 어니스트 러더퍼드이다. 러더퍼드는 핵물리학의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면서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됐다. 하지만 그들의 연구는 자신들의 의지에서 벗어나 사회적 상황에 따라 오용되는 비극의 역사를 맞기도 했다. ©researchgate

1918년 세계 대전이 끝나고 다시 캐번디시 연구소에 모인 러더퍼드의 연구팀은 자신들이 발견한 원자핵 연구에 매진한다. 엄청난 명성을 얻은 러더퍼드는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영국학사원 원장을 역임했고, 국회 상원의원까지 겸임하면서 공사다망한 나날을 보낸다. 이 때문에 비록 직접 연구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러더퍼드는 계속해서 학문 후속 세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러더퍼드의 조수였던 어스톤은 전자기장을 이용해 원자의 무게를 재는 질량분석기를 개발하여 모든 원자의 무게가 수소 원자의 무게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노벨상을 받았다. 러더퍼드를 동경해 연구소에 들어온 맨체스터 출신의 청년 채드윅은 알파입자와 가스 상태의 원자를 충돌시키는 실험 중 알파입자보다 투과성이 더 크고 전자기성을 띠지 않는 방사선에서 중성자를 발견해 노벨상을 받았다.

입자가속기의 연구도 러더퍼드의 연구에서 파생되어 나온 성과다. 러더퍼드는 알파입자를 쏘아 원자를 파괴하는 실험을 계속했는데 너무 단단하여 알파 입자로는 부술 수 없는 원자가 존재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러더퍼드에게 지도를 받은 콕크로프트와 월턴은 변압기와 축전기를 조합하여 초고압의 전력으로 수소 원자핵을 가속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1932년 이들의 장치는 리튬 원자를 두 개의 헬륨 원자로 분해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인공적으로 고에너지의 입자를 만들어 원자핵을 붕괴시키는 입자가속기 개발의 공로를 인정받아 두 사람도 1951년 노벨상을 받았다.

1937년 10월 갑작스레 쓰러진 러더퍼드는 부인이 옆을 지키는 중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세의 일이었다. 중성자의 발견, 가속기의 발명, 인공 핵반응 등 러더퍼드의 지도 아래에 캐번디시 연구소는 최전성기를 보냈다. 러더퍼드는 그 자신도 위대한 물리학자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항상 젊은 연구자와 교류하기를 즐겼고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후대 물리학자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연구팀은 노벨상을 받은 사람을 10명 넘게 배출했다. 러더퍼드는 러시아인, 독일인, 유대인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연구자의 배경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았으며 능력이 있다면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리학자가 직접 입대하는 대신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군복무를 대체하는 대체복무제도를 처음 도입한 인물도 러더퍼드다. 러더퍼드의 후원 덕분에 1차 세계 대전 후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입자물리학 연구는 후퇴 없이 계속 진전할 수 있었다.

원자력의 가능성이 발견된 것은 러더퍼드 사후 2년이 지나서다. 원자 안에 숨어 있는 막대한 에너지를 발견한 것도, 그러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이론적 배경과 실험기기를 개발한 것도 러더퍼드와 그의 연구팀이었지만, 원자 안의 에너지가 원자력 발전과 원자 폭탄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히 밝혀진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제 1차 세계대전 중 전황과 상관없이 적국의 물리학자와 함께 물리학 연구를 계속했던 러더퍼드의 제자는 핵폭탄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러더퍼드 자신도 제 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해군에 복무했지만 그는 결코 물리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무기 개발에 활용하려는 인물은 아니었다. 수제자 모즐리(원자 번호와 원자 질량과의 상관 관계를 밝혀냈다)를 전쟁 중에 잃은 러더퍼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과학적 성과가 핵무기 개발로 이어진 것이다. 그가 핵무기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러더퍼드의 유산은 과학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그는 '물질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탐구하는 순수한 과학자였지만 그 지식이 가진 가치는 누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러더퍼드 이후 과학의 역사는 정치, 사회, 경제적 조건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과학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과학적 발견은 순수한 지적 탐구의 결과일지도 모르나 그것을 어떻게 응용하는지는 정치‧사회적 맥락, 그리고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연구와 그것이 핵무기에 응용되었던 비극적인 역사는 과학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숙제임을 알려준다.

'핵물리학의 아버지'라는 제목이 붙은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전기. 러더퍼드는 물질의 구조를 알고자 연구에 몰두했지만 그의 연구는 이후 핵무기 군비경쟁의 씨앗이 된다. 핵물리학의 연구 역사는 과학이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wikipedia
다운로드
Share on Facebook Share on Naver Share on kakaostory Share on Twitter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