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스토리

"No More War!"
노벨화학상 수상자 라이너스 폴링
반전ㆍ반핵을 외치다

평생에 걸친 연구로도 받기 어려운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과학자가 있다. 그것도 화학상과 평화상이라는 전혀 다른 분야로 말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노벨 과학상과 평화상을 받은 그는 미국의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이다. 라이너스 폴링의 삶은 단어 뜻 그대로 '위대'하다. 물질의 비밀을 밝힌 과학자이자 세계 평화와 인류의 번영을 위해 운동한 사회운동가이다. 그의 삶을 함께 따라가보자.

타협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았던 화학자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Linus Carl Pauling)은 1901년 2월 28일 미국 올렌도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폴링은 밑으로 두 명의 여동생을 둔 독일 출신 이민자 집안의 장남이었으며 불행하게도 일찍이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병약한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유복한 집안은 아니었기에 폴링의 어머니는 장남이 빨리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 집안을 이끌어주길 바랐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뜻에 반기를 들고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올랜도 농업 대학의 화학기술부에 진학했다.

폴링의 사정을 딱 하게 여긴 교수진의 배려 덕분에 조교로 일할 수 있었던 폴링은 고단했던 학부 생활을 마치고 당시에는 결코 유명하다고 할 수 없던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칼텍)의 물리화학자인 아서 노이즈의 연구실로 진학했다. 그곳에서 폴링은 보어, 좀머펠트, 아인슈타인, 드브로이 등 유명한 학자의 방문 강의를 듣는 행운을 누렸고 1925년 20대 중반의 나이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유럽으로 건너가 1년 반 동안 유학 생활을 한 후 폴링은 1927년에 모교로 돌아와 조교수로 취직한다. 스스로 광대가 되길 자처할 만큼 강의에 정열을 쏟아부은 폴링의 강의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양자역학에 관한 폴링의 수업을 듣기 위해 600명의 학생이 몰렸다고 한다. 그 후 10년 동안 폴링은 영국의 윌리엄 브래그와 함께 분자 구조를 밝혀내는 X선 회절 전문가로 성장한다. 이를 통해 그는 복잡한 결정의 구조를 설명하는 이른바 '폴링 규칙'을 제안하기도 했다. 폴링 규칙은 복잡한 유기분자와 전이금속 화합물의 정확한 구조와 성질을 밝혀낼 수 있게 하여 현대 화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폴링이 제안한 혼성 오비탈의 개요. ©http://nogwon.blogspot.com/2017/11/2_11.html

폴링의 가장 큰 과학적 업적은 파동역학의 지식을 화학 결합에 접목한 원자가 결합법(오비탈) 제안이다. 분자 결합을 파동역학의 공명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 폴링의 설명법은 복잡한 수학을 싫어하는 화학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매우 직관적인 혼합 궤도 모형을 사용했다. 화학결합으로 생기는 분자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분자 내에서 전자의 움직임을 기술하는 수학적 함수인 오비탈이 제안됐지만 이것만으로는 많은 분자의 결합형태를 설명할 수 없었다. 폴링은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결합할 때 원자 오비탈이 혼합되어 새로운 오비탈을 형성한다는 혼성 오비탈 모형을 제안했다.

이 모형은 양자역학과 분자 화학 두 분야에 정통한 폴링이었기에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1931년에 발표한 논문, '화학결합의 본성'에서 혼성 오비탈 궤도 개념을 제안한 공로를 인정받은 폴링은 1954년 단독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화학자에서 반핵평화운동가로 변신하다

폴링이 정치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부인 에바의 영향이 컸다. 대학 수업에서 조교와 학생 사이로 만나 폴링과 결혼한 그녀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좌파 가정에서 자랐다. 미국 정부가 노골적으로 반공 정책을 펴던 시대였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회주의적인 정치 운동에 참여했다. 그녀의 영향을 받은 폴링은 1949년 미국 화학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하원에서 정부의 반공 정책이 유능한 교수자와 유망한 학생을 대학에서 추방하는 데 일조했으며 과학으로부터 인재를 빼앗는 결과를 낳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미국 FBI의 취조를 받기도 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자 폴링은 큰 충격을 받았다. 폴링은 훗날 이 사건으로 인해 자신은 과학자로서 연구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공헌해야 하는 위치임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1952년, 기어이 미국 정부가 수소 폭탄 실험을 시작하자 폴링은 자신의 연구도 뒷전으로 미루고 수소 폭탄 개발에 반대하는 사회 운동에 나선다. 그는 수소 폭탄 실험은 죽음의 재를 뿌리는 행위라고 말했다. 전 세계의 평균 방사능 수치를 증가시켜 미래 인류의 건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주장하며 반핵 캠페인에 매진했다. 미국 정부는 1% 정도의 방사능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며 폴링의 주장을 반박했지만 폴링은 1%의 방사능만으로도 세계에서 매년 태어나는 150만 명의 장애아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줄 것이라 주장하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1958년 1월, 폴링 부부는 49개국, 11,000명 이상의 과학자로부터 서명을 받아내 대기권 핵실험 폐지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UN 사무총장에게 제출했다. 핵폭탄 실험이 환경에 무해하다고 주장했던 수소폭탄의 아버지, 에드워드 텔러와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공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라는 명성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폴링의 연설 능력은 대단했는데 1958년에 출판된 "노 모어 워!(전쟁은 그만!, No More War!)"라는 책이 큰 성공을 거두며 폴링은 핵무기 반대 진영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반핵 운동에 앞장선 운동가로 변신한 폴링. ©chemeducator.org

폴링은 반핵 운동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폴링의 직장은 그의 거침없는 활동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보수적인 성향이었던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은 폴링의 정치적 행보를 탐탁치 않게 보았고 결국 21년간 폴링이 역임했던 화학부 학장 자리에서 그를 해고한다. FBI는 무려 24년 동안이나 폴링의 사생활을 뒷조사했고 미국 정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유를 들어 몇 번이나 폴링의 여권 발급을 거부하기도 했다. 언론은 폴링에 관해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냈으며 상원 의회에 소환되었을 때는 그 자리에서 바로 투옥될 수도 있었다. 당연히 미국 정부는 폴링에게 단 한 푼의 연구비도 지원하지 않았다. 노벨상 수상자의 연구실은 메말라갔다.

하지만 결국 폴링의 노력은 결실을 보았다. 미국과 소련은 부분적 핵실험 중지 조약을 체결했다. 1963년 10월 10일 이 조약이 발효되었고 폴링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단독으로 두 번이나 노벨상을 받은 인물은 폴링이 유일하다. 세계 곳곳에서 축하의 메시지가 날아들었지만,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의 총장은 이렇다 할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노벨 화학상 수상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벨 평화상 수상과 함께 폴링은 대학 안에서 급속도로 고립되어 갔다. 이제 정말로 과학자가 아니라 정치꾼이 되었다는 조롱을 듣게 된 것이다.

그는 결국 32년 동안 재직했던 교수직을 사임하고 샌타바버라 민주제 연구 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폴링은 캘리포니아 대학 샌디에이고 분교의 객원교수로 취임했으며 2년 후에는 스탠퍼드 대학으로 또다시 자리를 옮긴다. 가는 대학마다 베트남 전쟁은 명분이 없다며 비판을 쏟아내는 노교수를 대학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워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평화운동의 투사는 90살이 됐을 때도 활발하게 시민운동에 참여했으며 1991년에는 뉴욕타임스에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광고를 실기도 했다.

폴링에게 수여된 두 개의 노벨상. ©Corvallis Gazette Times

안타깝게도 같은 해 폴링은 직장과 전립선에 암이 생겼다는 선고를 받는다. 수술을 마치고 3년 동안 자신이 기적의 물질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비타민C를 대량 섭취하며 투병 생활을 했지만 1994년 향년 93세의 나이에 타계한다.

노벨화학상을 받을 만큼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과학자였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반핵평화운동에 반생을 바친 폴링은 그 대가로 학계에서의 지위를 반납해야 했다. 냉전 시대의 강력한 진영 논리와 사회적 비판을 무릅쓰고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그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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