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스토리

압둘 카디르 칸,
파키스탄의 '영웅' vs '최악의 핵 확산자'

'파키스탄 핵무기의 아버지'라 불렸던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2021년 10월 10일 85세 일기로 사망했다. 칸 박사는 자국에서 파키스탄에 핵무기를 안겨준 '영웅'으로 추앙받지만, 핵확산을 반대하는 서방 국가에게는 북한, 이란, 리비아에 핵기술을 퍼뜨린 '최악의 범죄자'다. 이런 엇갈린 평가는 핵무기의 득과 실에 관한 오랜 논쟁과 맞닿아 있다. 칸 박사의 삶을 돌아보며 핵무기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자.

파키스탄과 인도의 종교 갈등, 핵무기 경쟁으로 이어지다

칸 박사는 1936년 4월 1일 인도 마디아프라데시(Madhya Pradesh)주 보팔시에서 태어났다. 정통 이슬람교도 가정에서 자란 칸 박사는 인도에서 초, 중, 고등학교 정규 교육 과정을 마쳤지만, 인도 지역 대학교에 입학하진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며 인도 내 이슬람교도들이 힌두교와 기타 종교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기체 원심분리기를 통해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원리를 나타낸 그림. 원심분리기를 작동하면 무거운 우라늄-238(진한 파란색)은 아래로 가라앉고 가벼운 우라늄-235(하늘색)는 위로 이동한다. ⓒwikimedia

결국 1947년 8월 인도 서북부와 동북부 지역에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이 건국됐고, 칸 박사의 가족도 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 이 시기 인도 전역에서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 사이에 유혈 충돌이 일어나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등 종교적 내란이 계속됐다. 파키스탄이 독립하며 두 국가의 분쟁은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계 지역인 카슈미르 지방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1966년 소련의 중재로 휴전할 때까지 두 차례 전쟁이 일어났다. 이후에도 1971년 일어난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과 1999년 발발한 카르길 전쟁에서도 인도와 파키스탄의 갈등은 지속됐다. 파키스탄을 둘러싼 이와 같은 상황은 칸 박사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60년 칸 박사는 금속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고, 졸업 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물리동역학연구소(FDO)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FDO는 네덜란드, 영국, 독일이 공동 설립한 다국적우라늄컨소시업인 유렌코(URENCO)와 교류하고 있었는데, 당시 유렌코는 원심분리기를 이용해 우라늄-234(234U), 우라늄-235(235U), 우라늄-238(238U)이 섞인 육불화우라늄(UF6)에서 우라늄-235을 분리해 높은 순도로 농축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칸 박사는 유렌코의 제안으로 1973년부터 1974년까지 우라늄235의 농축도를 높이는 연구를 했다. 이때 그는 원심분리기의 설계와 핵무기의 원료인 고농축우라늄 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우라늄 기반의 핵무기의 장점을 체감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원자로와 재처리시설이 필요한 플루토늄-239(239Pu) 기반의 핵무기와 달리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는 작은 시설로도 충분했고, 때문에 '몰래' 생산하기 좋았다.

그런데 이때 칸 박사의 유럽 생활에 마침표가 찍히고 있었다. 1974년 5월 인도가 첫 번째 핵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귀국 9년 만에 핵무기를 개발하다

미국의 정치학자 한스 모겐소는 "다투고 있는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핵무장에 성공하면 다른 나라는 전쟁하다 죽거나 미리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 파키스탄 주독대사인 미안 압둘 하디드가 발간하려고 했던 회고록에서 칸 박사가 쓴 부분을 보면 당시 칸 박사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회고록은 출판되지 않았지만, 하디드와 친분이 있던 송종환 전 파키스탄 대사에 의해 국내 언론에 소개됐다. 칸 박사는 회고록에서 1971년 12월 고국인 파키스탄이 인도와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 연합군에게 패한 것을 두고 "부끄럽다"면서 "며칠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1998년 5월 28일 파키스탄은 발루치스탄 주에서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다. 사진은 핵폭발 연쇄반응으로 산에 먼지가 일어난 모습이다. ⓒwikimedia

그러던 중 인도가 핵무기를 개발했다. 사실 인도의 핵무기 연구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칸 박사는 이를 파키스탄이 처한 위험으로 받아들였다. 1974년 9월 칸 박사는 줄피카르 알리 부토 파키스탄 총리에게 편지를 써 우라늄 농축 기술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 기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 박사는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맡아달라는 부토 총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1975년 12월 유럽에서의 보장된 삶을 뒤로한 채 파키스탄으로 돌아왔다.

칸 박사는 파키스탄의 원자력 기관인 파키스탄원자력에너지위원회(PAEC)의 고문으로 있다가 이내 파키스탄 정부와 군의 지원을 받아 1976년 수도 인근의 도시 카후타에 기술연구실험실(ERL) 설립을 주도하고 이곳의 프로젝트 책임자가 됐다.

1977년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한 칸 박사는 기존 우라늄 농축에 사용하던 구형 원심분리기보다 정교하게 우라늄을 농축할 수 있는 신형 원심분리기를 개발했고, 1984년 12월 마침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 1998년 4월 파키스탄 정부는 핵실험에 앞서 발루치스탄주 사막에서 핵무기가 장착된 탄두(핵탄두)를 실어나를 가우리 미사일을 테스트하고 한 달 후에 발루치스탄주 차기에서 두 번의 핵실험에 성공한다. 이로써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보유한 최초의 이슬람 국가로 거듭났고 칸 박사는 국가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파키스탄 영웅이 떠난 날, 최악의 핵확산자도 떠나다

칸 박사는 안으로는 파키스탄에 열강에 맞설 '힘'을 준 영웅이다. 하지만 핵무기 개발 전후로 북한, 이란, 리비아와 기술을 교류하며 핵무기 확산에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에 핵비확산 측면에서는 '최악의 핵 확산자'로 불린다.

2017년 한 컨퍼런스에 참여한 칸 박사의 모습. ⓒ위키미디어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개발할 당시 소문을 들은 미국, 영국을 비롯한 몇몇 서방국가는 정보기관이나 기자를 파견해 첩보 활동을 하거나 핵 개발에 필요한 부품의 수출을 막곤 했다. 칸 박사의 행적을 면밀하게 조사하던 서방국가들은 2003년 칸 박사가 북한, 이란, 리비아에 핵기술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칸 박사는 2004년 2월 파키스탄 국영방송에서 세 국가에 고농축 우라늄 제조에 필요한 원심분리기와 기술을 팔았다고 시인했다.

파키스탄 정부의 개입 여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핵무기에서만큼은 파키스탄과 북한의 관계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9년 12월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인터뷰 내용을 보면 칸 박사는 원심분리기에 관한 기술, 설비, 설계도면, 육불화우라늄을 북측에 건넸고, 북한은 그 대가로 핵탄두 소형화 기술, 가우리 미사일의 전신이 될 미사일 부품을 파키스탄에 제공했다.

칸 박사가 핵 기밀 유출을 시인했음에도 파키스탄 정부는 그를 즉각 사면했다. 하지만 서방국가들의 요구로 2009년 2월까지 가택에 연금됐고 이후에도 정보기관들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2012년 새로운 당을 만들어 정계 진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종종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던 칸 박사는 2021년 8월 신종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고 입원 치료를 받은 뒤 퇴원했다. 그러나 폐 질환 증세가 악화돼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병원에서 결국 세상을 떠났다.

핵무기는 무자비한 살상력과 오염력을 가진 무기지만, 칸 박사에게는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유럽에서의 보장된 삶을 버리고 국가에 헌신한 영웅과 최악의 핵 확산자라는 안팎의 상반된 평가는 핵무기에 대한 논쟁이 끝나지 않는 한 계속 공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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