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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분열의 발견자 반핵 운동의
선봉에 서다, 오토 한

오토 한은 1938년, 프리츠 슈트라스만, 리제 마이트너과 함께 '핵분열'을 처음 발견했다. 핵분열은 원자핵과 중성자가 충돌했을 때 원자핵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원자핵으로 쪼개지는 현상이다. 이 공로로 오토 한은 프리츠 슈트라스만과 함께 1944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핵분열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되는 걸 알아챈 나치 독일의 명령으로, 오토 한은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에 강제 동원되기도 했다. 종전 이후에는 반핵운동가로서 활동했다. 오토 한의 일생과 그의 반핵 노력을 자세히 알아보자.

화학자로서의 오토 한

오토 한은 1879년 3월 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1968년 7월 28일 괴팅겐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유기 화학과 방사선 화학, 그리고 핵융합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유리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적 건축가가 되기 원하는 부모의 뜻에 따라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다. 그는 예술과 철학을 사랑했고 물리학 강의 시간과 수학 강의 시간에는 강의실에서 몰래 빠져나오곤 했다. 하지만 화학자 테오도르 칭케에게 재능을 인정받고 1901년, 만 22살에 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년의 군 복무를 마친 후 오토 한은 스승인 칭케 교수를 통해 화학 강의 조교 자리를 얻어 대학에 돌아와 유기화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04년, 런던에 건너간 오토 한은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방사능 연구에 매진하던 윌리엄 램지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램지는 한이 방사능 화학에 발을 들이도록 권유한 인물이다.

리제 마이트너와 오토 한. ⓒwikimedia

처음 만난 한에게 라듐의 원자량을 측정하는 연구를 맡긴 램지는 자신은 방사선 화학에 대한 예비지식이 전무하다며 주저하는 한에게 "모른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아무런 편견도 갖지 않고 연구할 수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라고 격려했다. 자신을 높이 평가한 램지로부터 용기를 얻은 한은 1905년 토륨의 방사성 동위 원소인 라디오 토륨을 발견한다.

1906년 램지의 권유로 캐나다 몬트리올대의 슈퍼스타 에른스트 러더퍼드의 연구실로 옮겨간 한은 그곳에서 라디오 액티늄을 발견한다. 그해 또다시 자리를 옮겨 독일로 돌아온 한은 베를린 대학 피셔 화학 연구소에서 메소 토륨(토륨 계열에 속하는 방사성 핵종)을 발견한다. 이곳에서 오토 한은 평생의 연구 파트너인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와 조우한다. 막스 플랭크에게 이론물리학을 배우기 위해 피셔 연구소에서 온 마이트너는 한과 함께 30년 동안 공동연구를 수행했다. 이렇게 방사능 연구자로서 엄청난 재능을 보인 한은 1912년에 베를린에 위치한 카이저 빌헬름 화학 연구소의 방사선 화학 부문의 책임자로 취임했으며 1928년에는 연구소장을 역임한다.

자신의 커리어가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오토 한은 1913년 슈체틴 시의회 의장의 딸인 에디스 융한스와 결혼한다. 하지만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군에 징병된 한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독가스의 군사 사용에 관한 기술적 연구와 개발에 종사한다. 이 동안 그의 파트너인 마이트너는 야전병원에서 엑스레이 기사로 근무한다. 종전 후 한과 마이트너는 91번 원소 프로토악티늄의 발견(1918년)을 시작으로 원자핵의 준안정 상태인 이성질핵(1921년)을 발견했고 오토 한의 조수 프리츠 슈트라스만과 함께 페르미 실험의 추가 시험을 실시하여 초우라늄 원소의 존재를 확인했다(1936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초우라늄 원소의 정체가 바륨임을 밝혀내고 중성자에 의한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했다(1938년). 이 발견은 스톡홀름에 망명 중인 마이트너를 통해 보어에 의해 미국에 전달됐으며 페르미의 연쇄반응 발견과 더불어 핵 속에 갇혀 있던 거대한 에너지가 분출될 석방의 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었다.

핵분열의 발견과 반핵 운동

1934년에 한은 이탈리아 위대한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의 발표에 관심을 가진다. 페르미는 우라늄에 중성자를 부딪치면 몇몇 방사성 물질이 튀어나오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이를 우라늄과 비슷한 인공 원소일 것으로 여겼다. 페르미의 실험을 재현한 한과 마이트너, 그리고 젊은 조수 슈트라스만은 처음에는 페르미의 해석과 일치했지만 점점 이해하기가 어려운 결과를 얻었다. 이때 불행하게도 오스트리아 국적의 유대인인 마이트너는 나치가 정권을 잡은 베를린에서 연구를 계속하기 어려워 1938년 코펜하겐으로 망명한다. 베를린에 남은 한과 슈트라스만은 1938년 말까지 실험을 반복했고 마침내 이전의 예상을 깨고 우라늄으로부터의 생성물 중 하나가 훨씬 가벼운 원소인 바륨의 방사성 형태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한다. 이것은 우라늄 원자가 두 개의 가벼운 원자로 분열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한은 이 놀라운 발견을 정리한 편지를 마이트너에게 보냈고 마이트너는 이 현상에 핵분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이미 과학자들은 이 발견에 숨겨진 엄청난 가능성에 주목했다. 독일은 핵분열을 군사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명망 높은 화학자였던 오토 한은 그의 동료와 함께 핵폭탄 연구에 투입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후 포로 신분으로 영국에 억류된다. 영국에 억류된 중에 오토 한은 슈트라스만과 함께 원자핵분열 반응의 공로를 인정받아 1944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그리고 1년 후,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자 한은 핵분열 발견이 일으킨 파괴적인 결과에 강한 충격을 받는다.

영국에서 독일로 귀환한 오토 한은 막스 플랑크 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존경받는 과학자이자 과학의 대변인으로 활약한다. 새로운 독일 연방 공화국에서 과학 재건에 이바지한 오토 한은 동시에 독일의 핵무장에 반대하고 핵전쟁 방지를 외치는 반핵 운동을 주도했다. 1954년에는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에 방송되는 라디오에 '코발트 60- 인류의 위험인가, 축복인가?'라는 호소문을 발표해 국제적으로 고무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1955년 마이나우 선언문과 과학자 18명의 서명. ⓒmainaudeclaration.org

그다음 해인 1955년 7월 15일에는 독일 남부의 마이나우 섬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 18명과 함께 마이나우 선언문을 발표했다. 핵무기의 사용과 방사능 오염으로 인류는 전멸을 맞을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핵무기 반대를 분명히 하고, '핵 억지력'이라는 개념의 허상을 지적한 선언문이었다. 이 선언문은 그해 말까지 52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서명했다.

오토 한은 일평생 핵무기 추가 개발과 관련한 모든 실험과 연구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1957년에는 독일의 핵과학자 17명과 함께 괴팅겐 선언문을 발표해 서독 군대의 핵무장에 반대했다.

오토 한의 일생은 20세기 원자폭탄 개발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창이자, 과학의 역할과 과학자가 가진 사회적‧윤리적 책임을 돌아보게 한다. 핵분열 발견은 실험실 내에서는 위대한 물리학적 발견이었지만, 실험실을 떠나서는 핵무기 제조라는 통제하기 어렵고 끔찍한 형태의 결과를 낳았다. 오토 한은 이를 노년에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는 오토 한과 같은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 결과가 미칠 사회적 영향을 인식하고, 올바르게 사용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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