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스토리

원자로와 원자폭탄 사이에서
고민하고 고뇌하다
엔리코 페르미

핵분열은 우라늄, 플루토늄처럼 질량수가 큰 원자의 핵이 중성자와 충돌해 둘로 쪼개지는 반응이다. 이때 발생하는 막대한 에너지를 활용하려면 반응을 제어하는 장치인 '원자로(핵반응로)'가 필요하다. 예컨대 원자력 발전에서는 원자로를 이용해 핵분열이 과도하게 일어나지 않게 유지하거나 중지시킨다. 이 원자로 개발이 지금의 원자력 평화적 이용의 시작인 셈이다.

원자로를 처음 만든 사람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이탈리아계 미국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다. 이탈리아에서 뛰어난 물리학자로 활약하던 그는 돌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미국으로 건너가 원자로를 건조, 원자폭탄 개발에 이바지했는데 종전 후에는 수소폭탄 개발을 가장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페르미에게 어떤 사연이 있던 걸까?

페르미의 삶을 바꾼 이탈리아의 인종법

엔리코 페르미는 1901년 9월 29일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서 통신부 직원이었던 알베르토 페르미의 셋째(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라틴어로 된 수학, 물리책을 즐겨 읽어 주변 어른들을 놀라게 했으며 학업에도 뛰어나 불과 17살이던 1918년에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같은 해 페르미는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이탈리아의 고등교육기관 중 하나인 피사 고등사범학교에 지원했다. 교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이곳의 입학시험은 어렵기로 정평이 났었는데 당시 페르미는 소리의 특성에 관한 문제에서 푸리에분석을 사용해 막대의 진동을 나타내는 편미분방정식을 유도하고, 이를 풀어내 1등을 차지했다.

대학 생활 초기 수학을 공부하며 이론적 기초를 쌓은 페르미는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루이지 푸치안티(Luigi Puccianti) 물리학과 교수의 지도를 받긴 했지만, 실력이 출중한 덕에 사실상 독학으로 일반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원자물리학 등을 익혔다. 페르미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해 4학년 때인 1922년 X선 회절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듬해, 페르미는 이탈리아 정부에게서 장학금을 받아 독일 괴팅겐대학교에서 저명한 물리학자 막스 보른에게 양자역학을 배워 1927년부터 1938년까지 로마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 시기 페르미는 파울리의 배타원리에 따라 전자의 특성을 예측하는 통계적 방법을 개발하는 등 이론 연구에 관심을 보이다가 1932년 중성자가 발견된 것을 기점으로 핵분열 실험에 몰두했다. 그는 원자량이 92인 우라늄에 느린 중성자를 충돌시켰을 때 새로운 방사성 물질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해 193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그런데 노벨상을 받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난 페르미 가족은 귀국하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 통치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유대인을 박해하는 인종법을 공포해 유대인 아내의 신변이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페르미는 곧 동료 과학자들과 우라늄-235를 이용해 핵분열을 연쇄적으로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내 원자폭탄 제작을 위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게 된다.

세계 최초 원자로의 탄생과 종전

엔리코 페르미가 개발한 세계 최초 원자로 시카고파일-1. ⓒwikimedia

맨해튼 계획에서 페르미는 연쇄적인 핵분열을 구현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이를 위해 필수 기구인 원자로 개발에 착수했다. 그의 연구팀은 세계 최초의 원자로인 '시카고파일-1(Chicagopile-1)'을 완성하고, 1942년 12월 2일 미국 시카고대의 스쿼시 코트에서 핵 연쇄 반응을 시연했다. 이 실험의 성공은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러머고도 공군 기지에서 진행한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으로 이어졌다. 몇 주 후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다.

1944년 미국 시민권을 얻은 페르미는 1946년부터 195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카고대 교수로 재직했다. 핵입자의 기본 특성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는 한편 시카고대에 거대 입자가속기인 싱크로사이클로트론을 건설하는 데 자문하기도 했다.

페르미는 원자폭탄 개발에 이바지했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계기로 죄책감에 시달렸다. ⓒwikimedia

페르미는 원자폭탄 개발에 크게 이바지했지만, 그 위력을 체감한 후 도덕적인 죄책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종전 뒤 그는 미국원자력위원회(AEC) 자문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해 초조해진 미국이 위력이 원자폭탄의 500배 수준인 수소폭탄 개발 계획을 발표하자, 수소폭탄을 '집단학살을 위한 무기'라며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미국은 그의 뜻과 반대로 수소폭탄을 개발해 냉전 시대의 군비 전쟁에 불을 지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활동했던 과학자들은 대개 암과 명을 동시에 지니는데, 페르미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는 원자폭탄 개발에 일조해 수많은 인류를 죽음으로 내몰고 후대에 핵전쟁의 공포를 남겼지만, 핵분열 연구로 우리 생활에 필요한 막대한 전기를 생산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가 연구한 방사성 동위원소는 암 치료에 쓰이기도 한다.

이외에도 페르미는 이론물리학과 양자역학 발전에도 공헌했다. 과학자들은 인공적으로 만든 원자번호 100인 새로운 원소를 그의 이름을 따 페르뮴이라고 명명하고, 엔리코페르미상을 제정해 그를 기리고 있다. 페르미는 원자력을 두고 "인간이 자연에서 얻은 힘을 현명히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성인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페르미의 삶은 우리가 원자력을 포함해 과학 자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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