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야누스라는 이름의 신이 나온다. 원래는 수호신이었으나 얼굴이 두 개라는 이유 때문인지 중세를 지나면서 양면성 또는 이중성을 가지는 것의 대명사가 됐다. 과학 분야에서 야누스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기술이 바로 원자력이다. 한편으로는 인류에게 한없이 커다란 에너지를 선물하지만,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원자력발전과 핵폭탄을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원자력 역사는 1959년 7월 14일 태릉에서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II 건설'을 위한 첫 삽과 함께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1978년, 고리 1호기로 최초의 상업 운전을 시작한 이후 언제나 평화적으로만 원자력을 이용해 왔다. 그간 우리나라는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을 설립했고 원자력을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이 생겼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국제적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KINAC)도 임무를 충실히 하고 있다.

원자력의 이용을 시작한지 60여년, 평화적 이용이 강조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KINAC의 전신인 원자력통제기술센터(TCNC)의 초창기(1995~2000년) 센터장을 지낸 김병구 박사를 직접 만나 우리나라 원자력 역사와 현 상황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석유 파동과 함께 귀국한 NASA 박사

김 박사는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던 해 국가에 기여하겠다는 일념으로 원자력 연구 개발에 나섰다.

김병구 박사는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자립의 핵심 멤버 중 한명이다. 대한민국 원자력 역사가 60년이 되던 2019년, '아톰 할배들의 원자력 60년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장인순, 전재풍, 박현수, 이재설 박사와 함께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의 뒷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김 박사는 본인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원자력에 몸을 담게 된 계기에 대해 밝혔다.

김 박사는 1972년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학위를 마치고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은 우리나라에서 고리 1호기 공사가 본격화한 해다. 세계적으론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때이기도 하다. 배럴당 $2 남짓하던 원유 가격이 하루아침에 $10까지 치솟았다. 한국도 직격탄을 맞았다. 당연히 고리 1호기 건설 사업은 굉장히 긴박하게 돌아갔다.

우리나라는 해외에 있는 인재들의 귀국을 추진했다. 김 박사 역시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이던 윤용구 박사의 권유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나이가 30대 초반이었는데 집사람하고 어린 아들 손 잡고 보따리 싸서 한국으로 왔죠. 기계장이가 원자력분야에서 뭘 할 수 있을까 했지만 뭐라도 국가에 기여할 것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NASA의 엔지니어였던 김 박사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원자력 산업의 커다란 기둥이 됐다. 우리나라가 원자력 활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가 원자력 발전과 핵무기 개발 두 가지 모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핵무기 개발 경쟁을 우려한 국제사회는 기존 핵보유국(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을 중심으로 핵비확산조약(NPT) 체결을 추진했다. NPT는 원자력이 평화적 목적 외에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금지하자는 국제사회의 약속으로 1969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하고 1970년에 처음 발효됐다.

"당시 국제적으로 NPT가입을 강하게 추진했어요. 가입하지 않으면 국제무대에서 퇴출하겠다는 협박은 아무것도 아니었죠. 소국(小國)들은 원자력 발전을 통한 경제 발전과 핵무기를 이용한 군사력 성장 중에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었고 국제적으로도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는 국가가 늘어갔습니다."

결국 한국은 1975년 NPT에 가입했다.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과 함께 원자력 통제 기능 시작

양국 간의 긴박한 협상과 여러 우여곡절 끝에 미국은 한국에게 원자력 발전과, 안전 관리, 규제 기술을 위한 조건부로 연구활동을 인정한다. 그리고 원자력 연구는 핵무기가 아닌 원자력발전(發電)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1980년 한국원자력연구소의 명칭은 '한국에너지연구소'로 바뀌었다. 이후 연구는 지속되었고 원자력 산업은 확대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원전 고리1호기 건설은 외국에 의존했지만 원전운영기술이 쌓이고 연구 및 산업 역량도 향상되면서 원전기술 자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1984년 정부의 원전건설 표준화와 기술자립 계획 수립에 이어 원자력기술의 국산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연구소를 중심으로 우리나라는 1980년대 핵연료 국산화, 1990년대 한국표준형 원전 개발을 성공시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남한과 북한은 비핵화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고 1992년 2월,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한반도비핵화선언'을 발효하게 되었다. 이 선언을 통해 남과 북, 두 나라는 핵무기에 대한 시험·제조·생산 등 일체를 진행하지 않고 오직 평화적 목적으로만 핵에너지를 사용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해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상호 사찰을 실시하는 것에 서명했다.

하지만 19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중 북한의 보고서에 적힌 플루토늄의 양과 실제 플루토늄의 양이 다른 것이 드러났다. 연이어 미신고 시설에 대한 북한의 사찰 거부가 발생하면서 문제가 터졌다. 결국 1993년 북한은 NPT를 탈퇴했다. 남북 간 협약이 깨진 건 말할 것도 없다. 1차 북핵 위기 사건이다.

그러나 남북 상호사찰을 위해서 사전부터 준비하던 우리나라는 북핵 사건과 상관없이 1994년 KINAC의 전신인 원자력통제기술센터(TCNC)를 설립했다. 북한의 시설을 사찰하기 위해 준비하다보니 국내 핵물질 관련 시설 관리와 핵 투명성 확보를 위해서도 종합 기술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김 박사가 1995년 TCNC 센터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핵비확산 의무를 수행할 별도 센터를 만드는 것에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원전 기술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원자력 이용의 모범국으로서 국제 의무를 선도적으로 이행할 필요가 있었다. 핵물질을 관리하는 안전조치뿐만 아니라 관련 물품이나 기술의 수출입통제 또한 원전 수출의 기반이 될 것이라 예측했다.

북한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도 IAEA의 핵사찰을 받고 있었다. IAEA가 국내 원자력시설에 직접 찾아와서 핵물질이 정해진 위치에 보관되어 있는지, 핵무기로 가공하지는 않는지 등 원자력을 평화적으로만 이용한다는 것을 매번 확인했다. TCNC는 이 작업을 스스로 진행하겠다고 나섰다. 우리 자신이 결백하다는 걸 완벽하게 시스템화해서 IAEA에서 아무 때나 불시 점검해도 충분히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김 박사의 역할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IAEA에게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했다.

김 박사는 나사의 한반도 위성사진으로 핵무기와 원자력발전이라는 선택의 결과물을 보여줬다. 남북의 야경에서 확연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많은 원전 시설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원자력과 관련한 활동이 있었는데 100% 평화적 목적으로만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죠. 원래는 신고한 핵활동에 대해서만 사찰을 받으면 됐는데, 90년대 이라크 핵무기 개발과 북한의 핵물질 양 불일치 사건으로 미신고 시설까지 IAEA가 언제든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줘야 했죠. 그게 바로 추가의정서(Additional Protocol)입니다."

우리나라는 1999년 2월 '한-IAEA 안전조치협정 추가의정서'에 서명했다. 대신 김 박사는 국내 사찰 제도를 통합안전조치(Integrated Safeguards) 체제로 업그레이드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우리 스스로 IAEA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안전조치 수단을 최적화하겠다는 의미로 IAEA가 원자력 활동이 투명하다고 인정한 나라에 한해서만 적용이 가능한 체제다. TCNC에 이어 KINAC까지 원자력통제 분야의 노력이 이어져 2008년 7월부터 적용되었다. 그 신뢰를 얻는데 10여년의 세월이 더 걸렸다고 볼 수 있다. 김 박사는 "통합안전조치 덕분에 추가의정서와 관련한 불시 사찰 빈도수가 많이 줄었다"라며 "IAEA와 우리나라 모두 선진화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은 핵무기에만 집중하고 있지만, 남한은 일찌감치 무기를 다 포기하고 평화적 발전에만 집중하고 있죠. 그 결과가 이 사진입니다."

김 박사는 한 장의 위성사진을 보여줬다. 한반도의 밤이 찍힌 위성사진에 남쪽은 불빛이 가득하고 북쪽은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하다.

우리나라 원자력 1세대들의 역사가 담긴 《아톰 할배들의 원자력 60년 이야기》의 표지.

김 박사는 우리가 핵무기를 포기하고 원자력 발전을 선택한 것은 행운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우리가 평화적 목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국제적 신뢰를 얻게 된 것도 큰 힘이라고 덧붙였다. 덕분에 이제는 핵비확산 모범 국가가 됐고 원전 수출까지 하는 나라가 됐다. 그런 의미에서 KINAC의 역할이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매우 중요함을 재차 강조했다. 김 박사는 이후의 삶을 과학기술과 사회의 소통에 할애하고 싶다고 말한다.

"후배들에게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우리나라의 원전 기술이 어떻게 세계 최고의 수준까지 발전해 왔는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역사를 정확하게 알아야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김 박사의 마지막 이 말처럼 김 박사는 작가로서 원자력을 둘러싼 문화담론을 나누는 데 힘을 다하고 있다. 이렇게 그가 원자력통제 분야에 남긴 발자취가 평화라는 거대한 땅을 단단히 다져왔듯이, 앞으로의 발걸음도 더 성숙하고 평화로운 사회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