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10월이면 각종 언론에서 노벨상에 가장 가까운 한국 과학자의 목록이 오르내린다. 1970년대 미국에서 입자물리학자로 활약한 이휘소 박사도 그중 하나다. 미국 유학길에 오른 지 10년 만에 펜실베이니아 대학 물리학과 정교수가 된 데 이어 페르미연구소 이론 물리학부 부장을 맡기도 한 이휘소는 1977년 42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기 전까지 1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학문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그런데 그는 1990년대 공전의 인기를 끈 한 소설로 인해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라는 오해를 샀다. 하지만 이휘소가 남긴 학문적 성과와 주변 학자들의 증언은 그가 엄혹하고 차가운 냉전 시기 독재와 핵무기에 반대하며 묵묵히 학문에만 매진했던 강직한 과학자임을 보여준다.

물리학 외길을 걸어온 이휘소 박사의 삶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휘소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의 여파를 온몸으로 맞이한 세대였다. 그러나 주변인들은 당대의 혼란 속에서도 세상 만물의 이치를 추구하려 한 열의에 찬 학생으로 그를 회고한다. 어려서부터 부잣집 친구의 집에서 빌려 온 다양한 분야의 책을 탐독하고, 의사인 어머니의 지지를 받아 병원 한 쪽에 자신만의 실험실을 꾸리는 등 학구열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이휘소 박사의 증명사진. 출처: wikipedia

이휘소는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수석 입학하지만, 수업을 들으며 자신의 관심사가 응용 공학이 아닌 이론 물리학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한국전 참전 미국 장교 부인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면서 미국 마이애미 대학 물리학과로 편입, 물리학도로서 첫발을 내디딘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만큼 우수한 성적을 내고자 공부에만 매진했고, 이휘소의 재능과 실력을 알아본 교수들은 그가 좋은 환경에서 연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휘소는 1960년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듬해 한국인 최초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자연과학부의 연구회원이 되었다. 그곳에서 이휘소는 양자역학 연구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그는 후일 소립자의 질량의 존재를 규명하는 힉스 메커니즘이 등장하는 데 기여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66년에는 뉴욕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의 방문 교수로 초청되었으며 그해 9월에는 양전닝 이론 물리학 연구소의 정교수로 부임했다. 1973년에는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 물리학 부장으로 부임했고 거의 모든 이론 연구에 관여했다.

혹자는 이휘소가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총애를 받고, 핵 연쇄 반응을 최초로 성공한 엔리코 페르미의 이름을 따 지은 페르미연구소의 관리직을 맡았다는 점에서 핵무기 개발과의 연관성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페르미연구소는 각 분야의 물리학자가 모여 고에너지 물리학을 연구하는 순수 학문 연구소일뿐더러, 이휘소가 연구소에 몸담은 1970년대는 핵무기 개발 열풍이 일던 1940년대와 시대적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더군다나 핵무기 개발은 수백 명의 핵공학자와 기술자가 있어야 가능한 프로젝트이기에 상황과 맞지 않는다.

이휘소 사후 출간된, 이휘소를 소재로 한 여러 소설은 이휘소 박사를 왜곡하는 데 한몫했다. 특히 가장 유명한 김진명 작가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는 박정희 정부 핵무기 개발 계획의 중심 인물로 등장해 핵무기 설계도를 수술한 다리뼈에 숨겨 들어오는 천재 과학자로 묘사된다. 이휘소의 유족들은 이런 내용이 이휘소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생전에 박사는 군사독재정권에 비판적이었으며 핵무기 개발에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유신 체제와 거리를 둔 과학자의 면모

이휘소의 업적은 소설 속 핵무기 개발이 아닌, 전자기력과 약력을 통합하는 게이지 이론을 재규격화하고 참 입자의 존재를 규명하는 등 입자 물리학의 핵심 주제를 정교화한 데 있다. 영결식 당시 페르미 연구소장 로버트 윌슨은 "근대의 이론 물리학자 20인을 거명한다면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인물"이라며 애도했고, 게이지 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압두스 살람은 "이휘소는 현대 물리학을 10여 년 앞당긴 천재다. 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라며 그의 공적을 널리 알린 바 있다.

1977년 페르미연구소에서 열린 이휘소 박사 추모 학술 대회. 이 학회에는 600명이 넘는 이론물리학자가 참석했다. 출처: 페르미연구소

펜실베이니아 대학, 스토니 브룩 대학, 미국 고등 연구원, 페르미연구소 등 그가 발자취를 남긴 곳은 모두 '더 나은 환경에서 연구할 수 있는 곳'이라는 기준에서 선택된 장소였다. 학부와 대학원 시절이 더 깊이 있는 지식을 얻는 데 집중한 시기였다면, 박사 학위를 취득한 20대 중반 이후부터는 학자로서 걸출한 업적을 남기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휘소는 이런 상황에서도 조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항상 갖고 있었다. 입자 물리학의 권위자 양전닝과 함께 새로운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후 이휘소에게 한국을 방문할 계기가 한 차례 생겼다. 1971년 한국과학기술원의 전신이자 한국 최초의 이공 대학원인 한국과학원(KAIS)의 하계 물리 학교의 강연자로 초대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군부의 유신 체제가 강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방문 계획을 전면 취소한다. "하계 물리 학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까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난처한 입장입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하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에서 이에 관한 초청이 오더라도 수락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엉뚱한 짓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국 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라며 유신 독재에 단호히 선을 그었다.

한국을 빛낸 명예로운 과학기술인을 소재로 한 2015년 '한국의 과학' 기념 우표. 이휘소 박사는 2006년이 되어서야 한국 과학 기술 한림원 '한국 과학 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다. 출처: wikipedia

또한 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는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보였다. 위로는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는 한편, 우방국인 미국은 베트남 전쟁 패전의 부담으로 인해 각지에 주둔한 미군을 철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4년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국내에서도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핵기술을 확보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었을 것이다. 이휘소의 입장은 이와 정면 배치된다. 그의 지도를 받은 강주상 전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는 스승이 "핵무기는 없어져야 하겠지만, 특히 독재 체제하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안 된다."라고 강경히 말했다고 증언한다. 이휘소는 적극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는 운동은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과학적 지식이 그런 일에 쓰이지 않도록 사려 깊게 행동한 순수 과학자였다.

그렇기에 이휘소 박사는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조국과 거리를 두고 연구에만 몰두했다. 1974년 서울대학교 원조 계획의 미국측 평가위원으로 20여년 만에 일시 귀국했을 때도 한달 가량을 머무르며 미 대사관 직원 숙소에만 머물렀다. 러시아 출신 과학자들이 자국의 학회에 참석했을 때 벌어진 납치 사건과 비슷한 일이 생길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최초 노벨물리학상의 유망 후보였던 이휘소는 안타깝게도 1977년 교통사고로 숨지고 말았다. 불운한 사고가 아니었다면 이휘소의 이름은 소설 속 인물의 모티프가 아닌 학계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과학자로서 더 널리 퍼졌을 것이다. 비록 학자 이휘소의 행보는 멈추어졌으나, 그가 남긴 지적 유산은 물리학의 계보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으며 독재와 핵무기를 반대한 강직한 과학자의 표본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