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7월 21일, 패전국인 독일의 포츠담에 마련된 회담장에는 야릇한 긴장감이 흘렀다. 미국과 영국, 소련은 나치 독일에 맞서 함께 싸워 승리를 거뒀지만 전후 처리를 놓고 갈등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언젠가 스탈린과 대립해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소련의 군인들은 불과 몇 달 전 엘베강에서 만나 유럽 전선에서의 승리를 함께 축하했지만, 양 군의 수뇌부는 언제쯤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될지 가늠하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이 반가운 소식을 접한 것도 그때였다. 맨해튼 프로젝트팀으로부터 뉴멕시코주 사막에서의 핵실험이 성공했다는 낭보가 날아든 것이다. 전후 소련에 확고한 우위를 보장할 무기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트루먼 대통령은 회담 사흘 후 스탈린에게 '파괴력이 강한 새 무기를 개발했다'고 지나가듯 알려줬다. 스탈린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저 남은 추축국인 일본에 그 무기를 썼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 다였다. 트루먼은 스탈린이 새로운 무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스탈린은 이미 핵무기의 정체부터 뉴멕시코에서 진행된 '트리니티' 실험까지 잘 알고 있었으며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을 뿐이었다. 스탈린에게 뉴멕시코 실험 정보를 알려준 사람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클라우스 푹스(Klaus Fuchs)라는 독일계 영국인 과학자였다.

나치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로 살아남기

젊은 시절의 클라우스 푹스 (출처: wikipedia)

푹스는 소련의 핵개발 초기부터 함께 했다. 독일 태생의 영국인 과학자가 소련과 협력한 이유는 푹스가 열렬한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푹스는 아버지가 신학 교수로 있던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했다가 킬 대학으로 옮겨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한데 나치당의 위세가 커져가던 1930년대의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로 살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나치당의 세가 강한 킬의 사정은 더했다. 푹스는 형 게르하르트와 함께 대중연설에 종종 나서곤 했는데 군중에게 얻어맞거나 강물에 던져지는 수모를 당하는 일이 많았다. 결국 1933년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자 푹스는 킬을 떠나 베를린의 카이저빌헬름 연구소로 가기로 결심했다. 카이저빌헬름 연구소는 오늘날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전신이다.

푹스의 베를린 생활은 무척 짧았다. 게다가 이렇다 할 사건도 없었다. 베를린에 있는 다섯 달 내내 나치당 정부의 공산주의자 색출을 피해 숨어 생활한 탓이다. 푹스는 도피 생활하는 와중에도 독일 공산당을 대표해서 파리 반(反)파시즘 회의에 참석했는데, 여기서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영국인인 로널드 건(Ronald Gunn)과 제시 건(Jessie Gunn) 부부를 알게 된 것이다. 건 부부는 푹스의 딱한 사정을 듣고 서머셋 클랩튼에 있는 자신의 집에 와서 지낼 것을 권했다. 독일인 푹스가 영국인 푹스로 바뀐 계기였다.

푹스의 인생이 바뀐 땅, 영국

제시 건은 독일의 젊은 공산주의 활동가가 베를린에서 언제 투옥될지 모르는 삶을 사는 것을 두고 보기 어려웠다. 건 부인은 윌스 가문이 후원하던 브리스톨 대학의 네빌 모트 교수에게 푹스를 채용해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푹스의 실력은 충분했다. 브리스톨 대학에서 조교수 자리를 얻은 푹스는 1937년 양자역학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푹스가 박사후과정을 마칠 때쯤, 모트 교수의 연구실에는 독일에서 망명한 젊은 과학자가 많았다. 연구실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푹스가 교육보다는 연구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모트 교수는 에든버러 대학에 있던 막스 보른에게 소개했다. 막스 보른은 양자역학의 기초 이론을 정립한 인물 중 하나로, 보른 자신도 독일에서 망명한 과학자였다. 푹스는 보른과 함께 두 편의 논문을 쓰며 학문적으로 꾸준하게 성장했다.

푹스의 첩보 활동의 큰 영향을 준 위르겐 쿠친스키(사진 오른쪽). (출처: wikipedia)

하지만 곧 시련이 찾아왔다. 1939년 푹스는 이제는 나치가 집권한 독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영국 국적을 신청했다. 그러나 국적을 신청한 지 한 달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적국의 국민인 푹스가 국적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영국 정부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인에 대한 신원조사에 나섰으며 푹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나긴 조사기간 동안 푹스는 브리튼 제도의 맨 섬, 캐나다 퀘벡 주 셔브룩의 수용소를 옮겨다녀야 했다.

셔브룩 수용소에서 푹스는 다시 한 번 운명적인 만남을 겪었다. 독일에서 망명한 공산당원인 한스 칼과의 만남이었다. 칼은 스페인 내전에 인민전선 소속으로 자원할 만큼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다.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의 팔랑헤당의 승리로 막을 내리자 영국으로 도피한 칼은 독일 출신 경제학자인 위르겐 쿠친스키와 함께 영국에 독일공산당 지부를 만들었다. 쿠친스키는 공산당원으로서 소련의 해외 정보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누이인 루트 쿠친스키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스파이 중 한 명인 리하르트 조르게와 동아시아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다. 감금생활에서 풀려난 후 푹스는 쿠친스키를 통해 소련군 정보총국(GRU)의 인물을 소개받았는데, 이때부터 푹스의 첩보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맨해튼 프로젝트 연구자로서, 소련의 스파이로서

소련이 푹스에 접근한 이유는 원자폭탄이었다. 동료들의 탄원 덕분에 수용소에서 에든버러로 돌아온 푹스는 다시 보른과 연구생활을 이어나갔다. 에든버러에서의 생활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대학교에서는 여전히 물리학 연구를 계속했고, 개인 시간에는 독일에서 망명한 공산당원들의 회합에 참석했다. 그러던 1941년 5월, 버밍엄대의 물리학 교수 루돌프 파이얼스가 찾아와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영국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 계획인 '튜브 합금(tube alloy)' 프로젝트였다.

영국 정부에서 주도하는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당연히 영국 국적자여야 했다. 파이얼스의 추천으로 튜브 합금 프로젝트에 참여한 푹스는 독일과 전쟁 중임에도 예외적으로 영국 국적을 얻을 수 있었다. 프로젝트에 대한 기밀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버밍엄으로 적을 옮긴 푹스는 파이얼스와 함께 핵무기 개발의 핵심 과정 중 하나인 동위원소 분리에 관해 연구했다.

로스 알라모스 시절의 푹스. (출처: wikipedia)

GRU로부터 '레스트'라는 암호명을 부여받고 소련 스파이 활동을 시작한 시기도 이 때였다. 푹스는 위르겐 쿠친스키와 루트 쿠친스키를 통해 주영 소련 대사관의 GRU 요원과 접촉하며 튜브 합금 프로젝트의 주요 정보를 전달했다. 푹스는 아마 이적행위라는 생각보다는 국제적인 연대를 중요시한 인터내셔널주의자로서, 파시스트에 맞서는 공산주의자 동지들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영국과 소련 모두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공동의 적에 맞서는 사이니 생각 자체는 크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영국과 미국도 독일군을 동부전선에 묶어놓기 위해 궁지에 빠진 소련을 도와 여러 신기술을 공유하곤 했다. 다만 핵무기는 제트엔진이나 전차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전략무기라는 점이 문제였다.

푹스는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의 이론물리분과에서도 일했다. 그가 담당한 분야는 원자폭탄 개발에서 핵심적인 부분인 플루토늄 폭탄의 핵을 내파시키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푹스가 로스 알라모스에서 여러 연구자들과 교류하며 핵심 인력으로 활약했다. 1945년 트루먼 대통령에게 회심의 미소를 짓게 한 트리니티 실험에도 자리를 지켰으며 폰 노이만과 열핵무기와 관련된 특허를 공동으로 출원하기도 했다. 리처드 파인만과도 친분을 쌓아서 파인만의 아내가 앨버커키에서 임종을 맞을 때, 병원까지 갈 자동차를 빌려준 사람도 푹스였다. 이론물리분과를 이끌던 한스 베테는 푹스를 '가장 소중한 동료 중 하나'이자 '우리와 함께 하는 이론물리학자 중 최고'라며 아꼈다.

첩보활동이 발각으로, 국제 핵비확산 체제의 이념이 바뀌다

푹스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미국에 남았다. 전쟁은 끝났지만 핵무기 개발은 끝나지 않았다. 푹스는 후속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오퍼레이션 크로스로즈'에 참여했으며 소련은 계속해서 푹스로부터 정보를 넘겨받고 있었다. 1946년 '맥마흔법'이 발효된 이후에는 푹스의 활동이 한층 위험해졌다. 맥마흔법은 원자력 관련 정보를 해외로 유출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했으며, 여기에는 적성국인 소련은 물론, 동맹국인 영국도 포함됐다.

맥마흔법은 많은 과학자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분야의 특성상 국제주의적인 사람들이다. 국적에 상관없이 분야별로 모여 토론하는 데 익숙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서 다른 연구의 기반이 되지 못한다면 지식이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핵무기의 위험성도 한 나라에서 비밀스럽게 꽉 쥐고 있기보다 여러 나라에 알려져서 너도나도 핵무기를 만들 수 있으면 전쟁 억지력으로 작용하지 않겠냐는 생각도 있었다. 일부 과학자들은 소련이나 동유럽의 동료들과 일부러 연구 정보를 공유하기까지 했다.

푹스의 첩보활동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 맥마흔법이 발효되자 푹스는 영국으로도 정보를 보내기 시작했다. 핵무기 관련 정보가 어느 한 나라의 손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맥마흔법이 영미 간 핵무기 정보를 공유한다는 비밀 조약까지 무시할 만큼 강성을 띠게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푹스였다. 맥마흔법이 만들어지기 전 푹스가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하던 미국의 화학자 해리 골드에게 전한 우라늄 생산량에 관한 정보는 미국 정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캐나다를 거쳐 소련으로 전달됐다. 그러나 소련의 연락책들의 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이 소식이 미국 내에 퍼지자 원자폭탄과 관련된 정보를 기밀로 유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해 졌다. 그 결과가 맥마흔법이었다.

맥마흔법으로 인해 미국으로부터 정보를 받을 길이 막힌 영국은 결국 독자적인 핵개발을 서둘러 추진하기로 했다. 튜브 합금 프로젝트의 정보를 미국과 공유하면서 비밀리에 맺어두었던 협정은 휴지조각이 됐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합류한 영국 과학자들도 다시 불러들일 때였다. 푹스는 영국에게는 소중한 핵심 인력이었으며, 1946년 8월 영국으로 돌아와서 하웰의 원자력연구소에 합류했다. 한편 영국에서도 푹스의 첩보활동은 계속됐으며 소련의 사무관인 알렉산데르 페클리소프를 통해 수소폭탄 관련 정보를 소련에 넘겼다.

푹스의 첩보 행각은 1949년에야 끝났다. 영국의 정보기관인 MI5는 푹스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미 전쟁 기간 동안 가동된 미국의 방첩 프로젝트를 통해 푹스가 소련의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꼬리가 잡힌 것이다. 푹스가 아직 미국에 있던 시절, MI5는 소련이 스파이망에 암호화된 외교 교신 채널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를 FBI에 전달했다. FBI는 소련 암호의 허점을 파고들어 메시지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에 따라 푹스의 정체도 밝혀졌다.

1949년이면 푹스가 스파이라는 증거는 MI5에 충분히 있었다. 문제는 정보의 출처였다. 푹스를 스파이 혐의로 법정에 세우려면 법원에 증거를 제출해야 하는데, 첩보활동으로 얻은 정보는 출처를 밝혀서는 안 됐다. 물증은 있지만 법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증거였던 셈이다. 결국 MI5는 푹스에게 자백을 받아내기로 하고 여러 차례 푹스를 불구속 조사했다.

푹스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여러 권의 책으로도 나와 있다. 사진은 <세계를 바꾼 스파이>라는 제목의 푹스의 전기. (출처: wallmart)

푹스는 처음에는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푹스의 신분이 노출됐다는 낌새를 눈치 챈 소련이 푹스와 연락을 끊고 외면하자 소련에 실망을 느낀 푹스가 자신이 한 활동을 털어놓았다. 푹스의 첩보활동은 중요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졌음이 밝혀지자 영국 당국은 크게 놀랐다. 법정에 선 푹스는 결국 스파이 행위에 대한 최고형을 선고받고 1950년 12월에는 영국 시민권도 박탈됐다. 1950년까지도 소련이 영국의 우방으로 분류되어 있어 최고형이 구속 14년이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1959년, 영국 웨이크필드 교도소에서 9년 4개월을 복역한 푹스는 모범수로 풀려났다. 영국 시민권이 없는 그에게 이제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히틀러도 없어진 독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버지가 당시 동독 영토이던 라이프치히에서 교수로 있다는 소식을 들은 푹스는 동독행 비행기에 올랐다. 동독에서 푹스는 마침내 연구자로서 평온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30대까지 잠잠할 틈 없는 격동의 세월을 보낸 푹스는 광신적인 공산주의자보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양심에 충실한 인물에 가까웠다. 그러나 좋은 의도가 때로는 나쁜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푹스는 미국과 영국, 소련의 핵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동독에 있던 시절 그가 가르친 중국 과학자들이 중국의 핵개발 프로젝트를 이끌기도 했다. 주요 핵보유국 5개국 중 4개 국가가 푹스의 영향을 받은 셈이다. 푹스 개인은 순진하기까지 한 이상주의자였을지 몰라도, 핵무기 관련 정보의 국제주의를 무산시키고 비밀스러운 핵무기 개발을 이끌고 말았다. 이는 결국 국제 핵비확산 체제에도 영향을 주어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국제기구를 설립하는 데로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