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이자 수학자, 논리학자로 새로운 철학의 길을 개척한 버트런드 러셀. 상대성이론으로 우주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연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철학과 물리학이라는 다른 분야에서 활동한 이들이지만 공통점도 적지 않다. 둘 모두 20세기 인류에 새로운 지적 지평을 보여준 지성인이다. 기존 사회 질서와 통념을 과감히 거스르는 반항아이기도 했다. 또한 핵무기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여 인류의 파멸을 경고한 동지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주도해 발표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은 냉전의 압박을 뚫고 반핵 평화 운동의 물꼬를 튼 것으로 평가된다.

핵무기 반대 운동가로 변모한 아인슈타인

천재과학자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말년에는 반핵의 목소리를 높였던 평화주의자였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널리 알려진 E=mc2 이라는 그의 발견이 원자폭탄의 핵심 원리를 제시한 것이라는 오해가 있다. 그러나 이 공식은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를 밝히고 이들을 서로 치환해 막대한 에너지를 낼 수 있음을 제시했지만, 군사나 산업 용도로 구현하는 방법을 다루진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미국 정부 주도로 수많은 과학자들이 핵무기 개발에 나선 '맨하탄 프로젝트'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핵무기 개발에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1939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핵무기의 개발을 서두를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는 헝가리 출신 유대계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 등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독일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실라르드는 독일 과학자들이 핵분열 실험에 성공했음을 알았고, 이를 바탕으로 조만간 핵무기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라르드 등의 설득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미국의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알리는 편지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다. 아인슈타인은 "우라늄을 재료로 하는 새로운 에너지원이 조만간 실용화되고, 새로운 폭탄 제조에 사용될 수 있다"며 우라늄 광석의 공급과 관련한 연구 지원을 촉구했다. 그러나 핵폭탄이 실제 일본에 투하된 후, 아인슈타인은 핵무기 개발을 촉구한 것을 후회했고 핵무기 반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2차 세계대전 종식 후에도 핵무기 개발이 지속되자, 반핵운동가로서 자국만이 원자폭탄을 보유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핵 정책은 위선적이라고 비판했다. TV에 출연해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을 겨냥하여 "수소폭탄의 개발은 인류에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며 강도 높은 발언을 하기도 했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사회 운동가로서의 러셀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에 앞서 저명한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였으며, 강한 신념의 평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때 반전 운동을 벌이다 교수 재임용을 거부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전쟁은 거대한 악이지만, 나치와의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덜한 악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기본은 평화주의자였다.

일본에 투하된 핵폭탄의 위력을 본 후 러셀은 더 이상의 핵무기 생산과 사용은 인류의 미래를 말살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종전 직후인 1945년 8월 15일 글래스고 포워드(Glasgow Forward)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인류는 멸망하거나 약간의 상식을 회복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며 "새로운 정치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핵무기 반대 운동에 나섰다.

적대적 갈등과 공포를 버리고 인간다움을 회복하자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2차대전이 끝났지만 평화의 전망은 더 어두워졌다.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소련이 원자폭탄 기술을 확보하자, 이제는 원자폭탄보다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 경쟁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1952년, 소련은 이듬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1954년 수소폭탄으로 비키니섬이 증발해버린 핵실험으로 지식인 사회는 아인슈타인과 러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특히 러셀은 동료 과학자들과 뜻을 모아 핵 군비 경쟁 반대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1955년 러셀은 아인슈타인에게 공동 선언문을 제안했다. 오늘날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으로 알려진 핵무기 반대 선언문이다. 이 선언문은 '어떤 나라의 국민이 아니라 향후 생존 여부가 불확실한 인류의 한 명'으로서 핵무기로 인한 인류의 절멸을 우려하며 분쟁 해결을 위한 평화적 방법을 찾을 것을 촉구했다.

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는 버트란트 러셀.

아인슈타인은 러셀이 작성한 선언문에 기꺼이 서명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선언문에 서명한 후 1주일 만인 4월 18일 세상을 떠난다. 핵무기 반대의 목소리는 금세기 가장 위대한 과학자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된 것이다. 선언문에는 프레데릭 졸리오 퀴리, 막스 보른, 퍼시 브리지먼, 유카와 히데키, 지프 로트블랫 등 당대 최고의 과학자 11명이 서명했다. 이들은 대부분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했다. 이들은 선언문을 미국, 소련, 영국, 중국 등 6개 강대국 국가 정상들에게도 전달하였다.

1955년 7월 런던에서 열린 선언문 발표 기자회견에는 세계의 신문방송 미디어들이 대거 참여하며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관심을 가질 기자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해 가장 작은 방을 빌렸으나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결국 현장에서 가장 큰 공간으로 옮겨야 했을 정도였다. 이 선언문 발표를 계기로 캐나다 노바스코셔주 퍼그워시에서 반핵 평화 운동을 위한 '퍼그워시 컨퍼런스'가 조직되어 매년 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러셀-아인슈타인 선언문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지식과 지혜가 지속적으로 진보하느냐 퇴보하느냐가 결정된다. 과연 우리는 싸움을 그만둘 수 없다고 해서 그 대신에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가? 우리는 인류 구성원으로서 인류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여러분의 인간다움을 상기하라. 그런 다음에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려라.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새로운 낙원으로 향하는 전망이 열릴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인류 전체가 멸종당할 위험이 여러분 앞에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 선언은 우리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갈등과 공포를 극복하고 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호소력 높은 목소리로 전하고 있다.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은 냉전의 짙은 압박을 뚫고 인류의 미래를 위한 평화의 메시지를 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이 이어지는 대립의 상황에 굴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핵비확산과 군비 축소의 길로 들어서게 된 첫 단추가 되었다. 냉철한 지성과 양심에 충실했던 아인슈타인과 러셀의 고민이 첫 단추를 꿰는 역할을 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