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만화를 보면 흰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쓰고 머리를 산발한 매드 사이언티스트(미치광이 과학자)들이 종종 등장한다. 이들은 과학자로서의 윤리와 책임 등을 망각한 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위험한 연구를 계속한다. 물론 실제 과학자의 모습과 매드 사이언티스트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매드 사이언티스트였던 과학자들이 있다. 에드워드 텔러도 그 중 하나다.

텔러는 이제는 고전이 된 영화인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 등장하는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의 실제 모델이었던 과학자다. 영화가 개봉된 이후 스트레인지러브 박사는 전쟁광 과학자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그의 모습은 수소 폭탄 개발에 열을 올리며 핵무기 개발에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던 텔러의 모습과 닮아 있다.

수소 폭탄의 아버지

젊은 시절의 텔러 (출처: wikimedia)

에드워드 텔러는 1908년 1월 15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헝가리는 공산주의와 독재 정권이 집권하며 정치적 혼란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어린 시절을 헝가리에서 보낸 텔러는 이 영향으로 공산주의와 파시즘 모두에 평생 적대감을 갖게 된다. 그는 독일로 떠나 카를스루에 공과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고 유대인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텔러는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다.

1943년 당시 미국에서는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총 책임자로 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가 설립됐고, 텔러도 이곳의 이론물리학 부서에 채용됐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원자폭탄보다 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같은 핵무기이지만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은 원리가 다르다. 원자폭탄은 우라늄 또는 플루토늄의 핵분열 연쇄반응을 이용한다. 반면 수소폭탄은 핵분열이 아닌 핵융합을 이용한다. 이중수소와 삼중수소를 고온에서 반응시키면 핵이 합쳐지면서 막대한 열과 에너지가 발생하는데, 원자폭탄보다 수십~수백 배의 파괴력을 지닌다. 하지만 수소폭탄은 당시 기술로서는 만들기 어려워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세계대전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수소폭탄보다는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하는 것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결국 텔러는 홀로 수소폭탄 연구에 몰두했다.

수소폭탄에 대한 텔러의 집착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냉전시대로 들어서면서 더 심해졌다. 1949년 소련이 첫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텔러는 원자폭탄만으로는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보다 천 배는 더 강력한 핵폭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당시 오펜하이머를 비롯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참상을 보고 더 이상의 핵무기 개발은 있어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다. 미국이 수소폭탄을 만들면 조만간 소련도 수소폭탄을 만들게 될 것이고, 훨씬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였다. 하지만 소련에 위협을 느낀 트루먼 대통령은 텔러의 손을 들어주었고,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이 시작됐다.

1952년 11월 1일 태평양의 에네웨타크 환초에서 폭발실험에 성공한 수소폭탄 아이비 마이크. (출처: wikimedia)

텔러는 폴란드 출신의 수학자 스태니슬로 울람과 함께 '텔러-울람' 설계라 불리는 수소폭탄을 개발했다. 핵융합 반응이 일어날 만큼의 높은 온도를 순식간에 만들기 위해 원자폭탄의 에너지를 기폭제로 사용한 방식이었다. 1952년 11월 1일, 텔러-울람 설계로 만들어진 최초의 수소폭탄 '아이비 마이크'가 태평양의 에네웨타크 환초에서 시험 폭발에 성공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450배에 달하는 폭발력이었다.

이로 인해 텔러는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그의 수소폭탄 개발은 결국 미국과 소련의 군비 경쟁과 핵무기 확산으로 이어졌다. 미국이 수소폭탄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듬해 1953년, 소련 역시 수소폭탄을 성공적으로 제작하였고, 영국, 중국, 프랑스 등도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오펜하이머 청문회의 악당'과 핵폭탄에 대한 집착

텔러는 수소폭탄의 아버지라는 수식어 외에도 오펜하이머의 경력을 망가뜨린 악당으로도 유명하다. 1950년대 미국은 반공주의가 극에 달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오펜하이머는 옛 소련의 간첩으로 몰려 미국연방수사국(FBI)에 고발당했다. 텔러는 1954년 열린 오펜하이머의 청문회에 증언을 요청받았다. 그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시절부터 수소폭탄 연구로 오펜하이머와 여러 차례 마찰을 빚어 개인적으로 감정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텔러는 FBI에게 오펜하이머가 지속적으로 수소폭탄의 개발을 방해했고, 그의 방해가 아니었다면 더 빨리 수소폭탄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며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청문회 결과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자의 혐의는 벗었지만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인물로 분류돼 모든 공직으로부터 추방당했다. 텔러의 증언이 전적으로 오펜하이머의 몰락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오펜하이머를 지지했던 대다수의 과학자들에게 커다란 배신으로 여겨졌다. 이 일로 텔러는 과학계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된다.

1958년 로렌스 리버모어 연구소 소장 시절의 에드워드 텔러. (출처: wikimedia)

이후 텔러는 정부와 군대의 핵 정책 자문 역할에 집중하면서 2003년 9월 5일 95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핵무기 개발을 주장했다. 그는 핵 실험 금지 조약에 반대했고, 미국이 소련과 무기를 감축하거나 타협을 하려고 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1980년대에는 레이건 정부의 전략방위구상(SDI)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SDI는 핵무기를 탑재한 소련의 미사일을 우주공간에 띄운 레이저나 인공위성 등으로 우주에서 요격한다는 계획이다. 당시 기술로서는 이룰 수 없는 목표였기 때문에 '스타워즈 계획'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SDI는 냉전이 끝나면서 흐지부지 됐다.

핵폭탄에 대한 텔러의 집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핵폭탄을 군사적인 목적 뿐만 아니라 운하나 항구 건설 등 대규모 공사에 활용하려는 '플라우셰어 프로젝트(project Plowshare)'에도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텔러는 땅에 큰 구멍을 내는 데는 핵폭탄만한 것이 없으며, 예산을 절약할 수 있고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제안한 아이디어 중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은 수소폭탄을 사용해 알래스카에 항구를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다른 과학자들은 방사능 낙진 때문에 야생동물과 원주민들에게 안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에드워드 텔러는 매우 뛰어난 과학자였지만 위대한 과학자는 되지 못했다. 핵무기에 집착하느라 과학적 재능을 낭비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5년 이전까지는 통계 역학, 양자이론, 고체 물리학, 핵물리학 등 다양한 물리학 분야에 기여할 만한 중요한 과학 논문들을 발표했다. 고체 표면에 기체 분자가 물리적으로 흡착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BET(Brunauer-Emmett-Teller)이론과 비선형 분자의 구조 뒤틀림 현상을 설명한 얀-텔러 효과(Jahn–Teller effect) 등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말년의 텔러 모습. (출처: wikimedia)

하지만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이론 물리학자였던 에드워드 텔러는 그림자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핵무기 전문가이자 정치 자문가인 에드워드 텔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전쟁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물리학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방어'와 '평화'는 핵무기 개발이었다. 이런 신념이 담긴 그의 조언은 50년 간 수많은 미국 대통령들에게 군비 경쟁을 하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텔러는 미국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도 20년 간 수소폭탄 제작과 핵무기 개발의 자문을 맡았다. 이스라엘은 현재 300여 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평화를 바랐지만, 오히려 인류는 그의 노력으로 핵전쟁에 대한 위협과 공포에 직면하게 됐다.

텔러는 말년까지도 끊임없이 정부와 군사 기관에 영향력 있는 과학 고문으로 일했으며, 핵 정책과 국방 문제 등에 대한 책도 출간했다. 하지만 자신의 연구가 인간과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한다.